14년만에 만난 딸과의 침묵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9-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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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탈북여성이 자녀를 중국에 두고 온 사연을 밝히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 탈북여성이 자녀를 중국에 두고 온 사연을 밝히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꿈에도 그리던 딸을 북한에서 헤어진지 14년만에 남한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고픈 이야기는 많았지만 서로 먼저 말을 꺼내길 주저합니다. 모녀 사이에는 탈북과 강제북송 그리고 남한행이라는  과정에서 너무 큰 아픔이 있었기 때문 입니다. 오늘은 대구에 사는 유혜림(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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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림: 엄마곁에 못있고 중국에 간 것은 엄마탓이라고 했는데 우리딸이 그러지 말라고 자기 탓이라고…

과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을 잊고 살자. 이제부터라도 행복하게 살자는 엄마와 딸. 양강도 혜산 출신의 유 씨는 지난 2009년 11월 먼저 탈북한 딸을 찾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꿈에서도 찾아 헤매던 딸을 남한에서 만난 겁니다.

유혜림: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딸을 14년만에 만났어요. 작년에 딸을 찾겠다고 모란봉 클럽에 나갔어요.  방송출연하고 보름만에 딸한테 연락을 받았어요. 우리 딸이 21살에 중국에 갔다가 지금 35살이예요. 만 14년만에 봤어요.

기자: 모습이 많이 변했을 텐데 알아보겠던가요?

유혜림: 진짜 그때 스무살 때 얼굴만 생각이 나고 그때 모습만 생각했는데 그래도 그 모습이 살아있더라고요. 오히려 더 이뻐졌어요.

기자: 중국에 있던가요? 아니면 남한에 있던가요?

유혜림: 한국에 들어온지 3년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같은 하늘아래 살고 있으면서 3년이란 세월을 못 만난 겁니다. 유 씨는 북한에 있는 가족을 생각해 소위말해 조용히 살고 있다가 마지막으로 이거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텔레비전 방송출연을 했고 그것을 본 딸의 친구가 유 씨의 딸에게 알려줘 모녀상봉이 이뤄진 겁니다.

탈북자가 남한에 입국하면 북한에서의 거주지, 직업, 학력 등 신상에 대한 것을 조사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입국한 엄마와 연결이 안됐던 것입니다. 딸은 조사받을 때 엄마의 음력생일을 말했고 둘째 아빠의 성을 따라 하다보니 이름 조차 전혀 다른 것이고 가장 중요하게는 엄마가 남한에 살고 있을 것이란 사실은 전혀 생각 못했던 겁니다. 유 씨도 딸이 북송이 됐거나 아니면 중국 어딘가에 살고 있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지 같은 남한땅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겁니다.

유혜림: 처음 와서 2년 동안은 딸 잡혀간 것 때문에 여기 저기 알아보느라 세월을 보내고 딸이 정치범 수용소 갔다는 말을 듣고 이제는 나도 생활을 해야겠다 해서 직업을 잡자고 대학들어가 졸업하고 자격증을 받고 또 손녀도 돌봐야겠고 해서 언제 편안한 시간은 없었어요. 손녀를 키우는 것이 큰 딸에게 보답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어요.

유 씨가 2010년 8월 남한에 갔을 때 그의 나이는 50살이었습니다. 어린 손녀를 데려왔기에 뒷바라지에  정신이 없었죠. 행방불명이 된 딸들보다는 당장 옆에서 할머니만 바라보는 어린손녀를 지켜줘야 했습니다. 그런 세월을 보내다가 둘쨋딸을 만났습니다.

기자: 딸을 14년만에 만나서 제일 먼저 무슨 얘기를 나눴습니까?

유혜림: 처음에는 하고픈 말은 많아도 서로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딸도 내 앞에서 말을 못하고요. 딸이 나를 찾겠다고 작년 여름에 중국을 통해 북한에 전화를 해봤더라고요. 그때 언니 총살당한 것을 들었더라고요. 그러니까 언니 얘기도 못하고 나도 그 아이를 보니까 큰딸 생각에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여기 기차역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뭐라고 얘기를 못했어요.

기자: 큰딸은 동생 찾으러 중국 갔었고 그런던 언니가 변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는 말을 못했던 것이군요.

유혜림: 그렇죠. 내가 둘째한테 너는 왜 언니 얘기를 안하나 했더니 딸이 하는 말이 왜 난들 언니 보고프지 않겠나? 엄마가 마음에 또 상처 받을까봐서 말을 피하지 그러더라고요. 나도 그렇고 딸도 자꾸 말을 피하는 것을 느꼈어요. 모든 말을 자꾸 조심하게 되고 … 북한에서는 할말 못할말 다했는데 지금은 마음을 아프게 할까봐 할말이 없어요. 이번에 애를 낳았으니 손자 얘기만 하고 아직 가슴에 품은 얘기를 시원하게 못해봤어요.

다시 만난 딸은 이번에 둘째를 낳았습니다. 손자인데요. 첫째 손녀를 낳을 때는 혼자여서 엄마 생각이 유난히 나더라고 했는데 이번에 둘째를 낳을 때는 유 씨가 딸옆을 지켰습니다.

유 씨는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딸을 찾았는지 그리고 탈북하고 나서 무슨일이 있었는지 하고 싶고 또 듣고 싶은 얘기가 산더미처럼 많았는데 정작 만나서는 머뭇거리면서 말문이 터지질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둘 사이에는 함께 할 수 없는 큰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혜림: 죽은줄만 알았던 둘째딸이 중국에 있다는 것을 알고 큰딸이 데리러 갔었거든요. 그런데 가고 보니 현실이 너무 북한보다 낫다고 큰딸이 나를 데리러 온거예요. 두 번은 안갔는데 세번째 와서는 그럼 자기 딸을 데려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럼 가서 내가 정황을 보고 오겠다고 했는데 가서 보니 좋더라고요. 거기서 5개월을 있었어요. 그런데 큰 딸이 북송됐어요. 그 뒤에 난 중국에 숨어 있다가 한국에 오게 됐어요. 딸생각 고향 생각할 때 텔레비젼을 보면서 가슴을 치면서 펑펑 울때가 많았어요. 아무런 상관없는 손녀를 욕하고 짜증날 때가 많았어요. 죽고 싶을 때도 많았고요.

현재는 북한에서 사망한 큰 딸의 유일한 혈육인 손녀와 살고 있습니다. 둘쨋딸은 엄마가 남한에 있는줄  몰랐기에 서울에 집을 받았고 결혼 후 가정을 꾸미고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정말 과거의 아픔은 다 잊고 앞만 보면서 행복해지자고 합니다.

유혜림: 내가 몸이 좋을 때는 밭에 가서 일해도 되고 식당에 가서 알바를 해도 되고 일하는만큼 내손에  돈이 들어오고 돈이 있는 것만큼 생활하고 하니까 너무 좋아요. 한 달만 일해도 1년먹을 식량을 사니까 일단 제일 마음이 편한 것이 그거예요. 제가 지금 대구시 탈북자 모임을 만들어서 마음도 달래고 음식도 만들어 먹고 하는데 거기서 회장을 맡았어요. 우리가 봉사도 하고 하는데 그런데서 보람을 찾고 있어요.

14년 만에 남한에서의 재회. 딸은 엄마의 행복을 그리고 엄마는 그런 딸의 행복을 지켜주며 못 나눈 정을 나누며 살겠다 다짐합니다.

유혜림: 우리딸이 한국사람과 사는 것이 어떤가 했더니 괜찮다고 신랑이 잘해준다고 행복하다고 해요.  말하는 것이 이제라도 여기 와서 사니까 엄마가 행복하면 되지 않겠는가 딸은 계속 말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대구에 사는 유혜림(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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