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9-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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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평택의 한 공장 조립라인에서 직원들이 부품을 장착하고 있다.
경기도 평택의 한 공장 조립라인에서 직원들이 부품을 장착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북한주민은 탈북하는 순간 주변인들에게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다가 남한에 가는 순간 멍에에서 해방 됩니다. 그리고는 각자 자신의 능력을 발휘를 할수 있는 곳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데요. 오늘은 일할 수 있는만큼 일하면서 자식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말하는 허초히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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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초히: 저희가 자고 일을 나가려고 거리에 나가보면 10미터 간격으로 사람들이 늘어져 있었어요.

함경북도 청진 출신의 허 씨가 말하는 것은 고난의 행군시절 자신의 동네에서 벌어졌던 일입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전무후무한 일로 상상하지 못했던 겁니다.

허초히: 진짜 그것을 해본 사람이나 인정을 하지 저희가 말하면 잘 모를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진짜 그럴까 하는 정도예요. 오죽하면 집이 필요업기 때문에 집하고 빵 5개하고 바꿔 먹을 정도였어요. 그정도로 먹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요. 쌀을 안주니까 두부콩, 우리가 말하는 매주콩을 배급줬는데 그 매주콩을 가지고 뭘 어떻게 해먹을 거예요? 쌀도 없는데…저의 엄마는 매주콩을 물에 불려서 갈아서 죽을 쒔어요. 두부를 못하고 순두부 식으로 하는 거예요. 솔직히 저는 병에다 넣고 안다녔는데 저의 직장에 다니는 남자들은 다 술병에 비지를 넣어와서 그것을 마시고 일하는 겁니다. 그정도로 정말 힘들었어요. 95년부터 97년까지 3년은 최악이었어요.

당시 탈북은 정치적 이념의 복잡한 문제가 아닌 먹고 살길을 찾아 강을 건넜던 행위였습니다.

허초히: 1995년부터는 모든 것이 끊긴 상황이었어요. 배급도 안주고 회사에서 일해도 돈을 안주지 쌀을 안주니 일을 나갈 수도 없고 사람들이 엄청 거기에 시달려서 방황했다고 봐야죠. 집에 안들어가고 꽃제비 하고요. 저의 경우는 단련대에 들어가기 전이죠. 회사에서 일하다가 너무 사정이 안좋아 일을 안나갔더니 저를 꼬빠크에 넣더라고요. 거기서 제가 한 달인가 있다가 나와서 힘들어서 살길을 찾아야 하는데 찾지를 못하고 어쩔수 없어서 담배장사를 할까 해서 나선 길이 꽃제비 생활이 된거죠. 집도 못들어 가고요.

기자: 그것이 몇 살때 일입니까?

허초히: 27살이요.

노동단련대를 나와선 꽃제비가 됩니다. 인생에서 제일 꽃다운 나이에 말입니다. 일거리를 찾을 수도 없었을뿐더러 인민반장이 감시와 주변의 손가락질이 그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고 돈을 빌려서 장사라도 해보자 했지만 사기를 당해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삶의 벼랑끝에 서기 전에는 정말  평범한 생활이었습니다.

허초히: 제가 대학 다니다 몸이 안 좋아서 대학을 중퇴하고 1호 용광로 제철소에서 기중기 운전공했어요. 일을 안 나가니까 꼬빠크(노동단련대)에 보내는 명단에 제 이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겁이 나서 집에도 못들어 가고 집을 뛰쳐 나간거죠.

허 씨는 1997년 탈북해서 중국에서 살다가 2003년 북송 됩니다. 그리고 북한으로 가서는 6개월 노동단련대에 있다가 나와 재탈북과 강제북송을 당했고 결국 11호 증산 교화소까지 가게 됩니다. 북한에서는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거죠. 그런 이유로 해서 허 씨는 다시 탈북해 남한행을 선택합니다. 허 씨가 남한땅을 밟은 것은 30대 후반으로 그의 나이 37살 때입니다.

허초히: 조금 적응하기는 힘들었지만 저는 하나원을 수료하고 나와서 딱 4일만 쉬고 지금까지 일을 한 상태여서 그렇게 힘들다는 것은 크게 못느꼈지만 가끔 지금까지 공포심이랄까요? 한국말로는 공황장애죠. 감옥생활 그리고 매맞은 생각이 들어서요. 저는 지금까지 화장실에 가도 문을 못 닫고 일을 봐요. 왜냐하면 좁은 공간이 저에게는 지옥이예요. 좁은 공간에 가면 저를 갇워두는 생각이 들어서요.

북한 교화소에서의 2년은 지금까지 허 씨에게 정신적인 장애를 줄만큼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허 씨는 그런 아픈 기억을 뒤로 하고 정말 열심히 남한생활에 적응했는데요. 매일 쉬지 않고 일한 10년 세월이면 지금쯤 꽤 돈도 저축을 했지 않을까 싶은데요.

허초히: 아니요. 모으는 것은 쉽지가 않더라고요. 남한생활에서 제가 처음에 최저임금 시급으로  4,580원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변화한 것을 보면 그때 당시에는 진짜 150만원 벌기가 힘들었어요. 돈을 저축한다는 생각보다는 중국에 있는 딸 데려와야 하고 북한에도 좀 돈을 보내줘야 하고 하다보니까 돈을 크게 모으지는 못하고 살면서 또 이것저것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하다보니까 아직까지  저축은 저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기자: 지금은 어떤 일을 하시는 겁니까?

허초히: 예전부터 일하던 전자회사 다니고 있어요.

육체적인 노동은 아니고 켄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는 공장에서 단순노동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주 5일은 정해진 시간에 직장에 나가고 주말에는 자기 시간을 가지면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허초히: 저는 아침 집에서 6시에 일어나 6시 반에 출근하는데 차몰고 회사에 가면 7시반이 돼요. 그러면 8시반부터 일을 시작해서 저녁 8시까지 일하고 집에 오면 9시입니다.

기자: 하는 일은 뭡니까?

허초히: 하는 일은 전자회사인데 텔레비전, 라디오, 핸드폰, 집집마다 불켜는 등 안에 들어가는 부속품을 만드는 회사예요.

기자: 말씀을 들어보면 매일 10시간씩 일을 하시는 데 너무 일을 많이 하시는 것 아닌가요?

허초히: 그런데 원래 8시간 일하면 저희가 5시반에 퇴근인데 다 잔업을 하니까 2시간씩 더 일하다보면 솔직히 힘은 들죠.

주변에서 허 씨을 보는 사람은 일을 너무 많이 하니까 힘들게 산다 하고 말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남들보다 본인의 생각이겠죠. 허 씨의 생각 들어봅니다.

허초히: 일하면 행복하죠. 좋지요. 제가 일한만큼 보수를 받잖아요. 일을 했는데 돈을 안주는 것은 없잖아요. 일을 강요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앞에 차려진 일을 해야 떳떳하게 돈을 받을 수 있으니까 저는 일에 대한 불만은 없어요.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거예요.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을 권리가 없어요. 제가 작년에 한 5개월 정도 공백기였어요. 일이 끊겨서 집에서 쉬었는데 굉장히 불안했어요. 깨어나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좋고 제가 일할 수 있는만큼 일할 수 있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허 씨는 지난해 중국에서 헤어진 딸을6년만에 찾았는데요. 그 딸은 대학을 졸업하면 남한으로 가서 허 씨와 함께 살겠다고 합니다. 이제 얼마 있으면 남한에서 모녀상봉이 이뤄지는데요.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듯 앞으로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 다짐해 봅니다.

허초히: 저의 딸이 원하는 일을 시킬 것이면 엄마가 부끄럽지 않고 남한테 해되는 일을 안하고 항상 긍정적으로 살도록 교양할 것이며 저의 딸하고 남한테 해가 안되는 엄마 딸이 되게 살도록 하겠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청진 출신의 허초히 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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