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좋은 세상에 내 꿈을 펼쳐야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20-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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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KT서비스남부 인재개발아카데미에서 직원들이 교육을 받는 모습.
사진은 KT서비스남부 인재개발아카데미에서 직원들이 교육을 받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사는 탈북자 중에는 좀 빨리 젊었을 때 건강한 몸으로 남한생활을 시작했었더라면 하고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새롭게 출발하는 인생인데 탈북 과정에 얻은 후유증으로 마음처럼 몸이 안 따라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춘미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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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미: 고향은 평양이지만 아버지가 고급 장교에요. 형제가 여러명 되지만 고향이 다 다르거든요. 저도 평양에서 태어났지만 얼마 살지 못했어요.

사실 태어난 곳은 별 의미가 없고 탈북 전 생활한 청진이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거창하게 탈북을 준비했던 것은 아니고 정말 어처구니 없이 인생의 전환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춘미: 탈북 한 것은 제가 하자고 한 것이 아니고 당시 북한여성을 얼려서(꼬여서) 중국에 팔아 넘기는 것에 제가 걸렸어요. 2006년이었는데 두만강인줄도 모르고 건넜다가 3개월만에 북송 돼서 한 2년을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잠깐 있었던 중국에서 생활로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됩니다. 그전에는 도강을 하면서도 탈북이란 것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중국에서의 강제북송 이후 이 씨는 진짜 탈북을 결심하게 됩니다.

이춘미: 감옥 12호 교화소라고 회령 정거리 교화소에 있다가 나왔습니다.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는 아버지가 군인이어서 먹는 것도 남들처럼 못 먹고 하지 않았는데 감옥에 가서는 내 인생의 모든 체험을 다 해본 것 같아요. 죽을 고비도 건너봤고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고 정말 인간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오죽하면 부모 원망도 해봤고 원망과 배고픔을 견디며 살면서 북한이 이렇구나 하는 것을 알았어요. 잠시 몇 달 중국에 건너가서 보니까 북한에선 사람도 잘 못 먹는 옥수수를 중국에선 돼지가 먹고 하니까 우리가 북한에서 배웠던 것이 진짠지 의문이 들더라고요.

교화소에서 나온 후에는 정상생활을 할 수 없었고 언제나 감시가 붙고 꼬리표가 붙어서 2년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감시가 소홀해진 2010년 12월 압록강을 건너 중국 심양에 1년 있다가 2012년 남한에 입국합니다.

이춘미: 천국 같죠. 진짜 천국이 여기구나 했어요. 말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일하면 돈도 벌고 진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할 수 있는 곳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기자: 남한에서는 어떤 일을 해보셨나요?

이춘미: 저는 감옥에서 많이 얻어 맞고 해서 아파서 힘든 일은 못했습니다. 내가 나올 때는 정착금 주는 것 브로커 비용을 갚고 보니 50만원 가지고 나왔거든요. 그 돈으로 생활하자니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들과 고추 따는 일도 하고 양파 캐는 일도 하고 농촌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청소 일도 하고요.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북한에 아들이 있으니까 돈도 보내줘야 하고…

남한에서도 힘들게 생활 했지만 북한에 있는 가족 생각에 자신을 위해 돈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아껴 모은 돈을 송금하고는 자신은 늘 최소한의 것으로 생활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편했습니다. 북한에서처럼 감시자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생활총화다 교육이다 해서 동원되는 것도 없었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남한사회를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했는데요.

이춘미: 저도 북한에서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배운 것이 80 퍼센트는 거짓이었어요. 북한에선 김일성이 말한 것 알려주는 것만 알았는데 여기 와 보니까 우리는 북침이라고 배웠는데 남침이고 여기는 통신이 다 되고 인터넷이 되고 외국에 나가려면 갈 수가 있잖아요. 대통령이 잘못하면 욕도 하고요.

남한생활을 하면서 크게 행복했다거나 좋았던 순간은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하나 손꼽으라면 해외여행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이춘미: 다른 것은 모르겠고 교회에 다니는데 일본 선교사업을 가라고 저를 추천해서 갔어요. 제일 기뻤던 것이 그거였어요. 북한에 있었으면 비행기 타는 것을 꿈도 못 꾸는데 일본에 비행기 타고 갔던 것은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남한에서 태어난 사람 같으면 별 큰 사건이 아니지만 북한에서 와서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간다는 것이 엄청난 일로 느껴졌던 이 씨. 생활하면 할수록 좀 늦게 남한에 온 것이 아쉽답니다.

이춘미: 그런 생각 많이 했습니다. 한 10면만 빨리 왔더라면 했어요. 여기선 영어를 못하면 안 되겠더라고요. 처음 와서 한 것이 컴퓨터 학원에 갔어요. 그리고 지금은 영남외국어 대학에 다니고 있고요. 조금 더 빨리 왔더라면 직업도 구했을 텐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알면 알수록 북한에 대한 배신감도 느끼는데요. 먹고 살려고 도강했던 것 때문에 교화소를 다녀왔던 것이 분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후유증으로 몸이 많이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이춘미: 감옥 안에서 죽는 것도 많이 보고 도망치다 총에 맞아 다 죽게 된 사람을 끌고 와서 마당에 세우고 우리들 다 보게 했거든요. 그 악몽이 지금도 밤이면 나타나고 얻어맞고 밤늦게까지 일하고 한 것이 후유증으로 남아서 머리가 아프고 밤에 못 자고 그렇습니다.

기자: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운동을 하거나 좋은 것을 먹거나 하는 자신만이 하는 비법이 있다면 소개를 해주시죠.

이춘미: 비법은요. 여러 가지 과일 사과를 갈아서 마시기도 하고 좋다는 것은 다 사먹기도 해요.

이 씨가 느끼는 북한사람과 남한사람은 참 달랐습니다.

이춘미: 북한은 확실히 말 한마디를 해도 세요. 합시다 꼭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데 여기서는 내가 느낀 것이 우선 말이 부드럽고 속은 어쩐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이미지가 좋아요. 특히 교회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고 하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이상했어요. 여기 사람들은 못사는 사람 도와주고 북한 사람 왔다고 먹으라고 하고요. 북한 사람이 받기는 좋아하고 그렇게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요.

언젠가는 통일이 될 것을 믿으면서 그때가 되면 역할을 하기 위해 준비 중입니다. 그래서 올해 전문대를 졸업하면 4년제 대학에 편입할 계획도 갖고 있는데요. 그러기 위해 건강에 더 신경을 쓰고 있죠.

이춘미: 저는 북한에서 굶어 죽고 그런 데서도 살았는데 이 좋은 세상에 와서 죽을 수는 없잖아요. 나도 몸이 아프지만 북한에 있는 아들에게 돈도 보내고 했거든요. 지금도 생각해요.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잖아요. 돈은 못 벌어도 나는 시를 쓰거든요. 내 몸에 맞게 일도 좀 하고 남들처럼 살아가야죠. 여기는 노력하면 된다는 것은 확신하거든요.

제 2의 고향 오늘은 청진 출신의 이춘미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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