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행복할꺼야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8-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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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2일 강원북부하나센터에서 북한이탈주민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한 산림분야 일자리 지원 설명회를 하는 모습.
사진은 12일 강원북부하나센터에서 북한이탈주민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한 산림분야 일자리 지원 설명회를 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어제는 울었지만 내일은 행복할거야 이런 노래가사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탈북민은 남한에 도착하기까지 여러 고초를 겪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중국에 살수 없어 남한행을 택했다고 말하는데요. 오늘은 세 아이의 엄마로 대학졸업을 앞두고 있는 황재경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황재경: 북한에 3번 북송되다 보니까 더 이상 중국에서 그냥 살 수가 없더라고요. 무서웠어요. 주변 사람들이 한국에 가면 신변 쪽으로는 안전하다.

황 씨는 탈북해 중국을 거쳐 지난 2008년 남한땅을 밟았습니다. 왠만하면 중국에 살았겠는데 강제북송에 대한 두려움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첫번째 인생의 전환점은 황 씨가 18살 되던 해였습니다.

황재경: 1999년 12월에 나진 선봉으로 장사를 갔다가 밑천을 열차에서 다 잃어 버렸어요. 그래서 앞으로 가지도 뒤로 가지도 못할 상황에 자그마한 강이 하나 있는데 건너편이 중국이라고 하더라고요. 아주머니들 하는 얘기가 중국에 가서 한 달만 벌어도 여기서 1년 먹을 것을 벌수 있다는 얘기가 귀에 들렸어요. 집에 있는 전재산을 날렸으니 집으로 갈 수도 없고 한번 가보자 그렇게 철없이 중국으로 갔던 것 같아요.

남한에 갔을 때는 이미 성년이 된 25살때였는데요. 보통 남한사람들이 이정도 나이면 대학진학을 한  여성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됐을 나이고 고등학교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했으면 사회인으로 한참 열심히 일할 때인데요. 황 씨는 사회정착교육시설인 하나원에서 나올 때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습니다.

황재경: 한국에 처음와서는 학교는 생각을 못했고 일단 취직을 하려고 하니까 이력서를 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력서가 뭐냐고 했더니 여기와서 할 수 있는 것이 뭐고, 뭘 잘하는지 쓰는 건데 거기에 학력을 쓰는 것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북한에서 중학교 2학년을 다니다 말아서 여기 초등학교 학력도 안되는 거예요. 학력 때문에 취직이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서 검정고시 준비를 했죠.

기자: 하고 싶었던 것은 뭐였나요?

황재경: 제가 하고 싶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공부가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같이 하나원 나온 동기들이 다 돈을 버니까 왜 돈을 벌어야 하지 하니까 돈이 없으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으니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중국에서처럼 완전히 다른 말 때문에 곤란을 겪지는 않았지만 남한사회가 자본주의 체제로 그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이었기 때문에 정착이 쉽진 않았습니다.

황재경: 공부하는 것도 많이 어려웠어요. 외래어도 많고 어른, 아이가 섞여있는 환경에서 공부하려니까  마냥 쉽지만은 않더라고요.  한국에 대한 정보나 가서 돈을 벌자 이런 것을 생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오게 된 것이고 와서 돈을 벌자는 생각을 했어요.

기자: 검정고시를 하고 대학을 갔는데 어땠습니까?

황재경: 못 알아듣겠는 말은 그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무지 괴롭혔어요. 내가 이해될 때까지요. 담임선생님을 무지 괴롭혔던 것 같아요.

기자: 학원을 다녔나요? 아니면 대안학교였습니까?

황재경: 저는 사설학원에 다녔어요.

기자: 학원을 다니면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검정고시를 다 봤다는 건데 기간은 얼마나 걸렸나요?

황재경: 기간은 일하면서 다녀서 한 2년 정도 걸렸어요.

대학진학을 위해 공부만 할 수는 없었고 일도 해야했습니다. 아침에 직장에 나가 일하고 퇴근하면 바로 학원에 가서 대학진학을 위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때는 희망도 있었고 젊었기 때문에 시간을 쪼개 쓰면서도 힘든지 몰랐는데요.

황재경: 그때 웅진 코웨이라고 비대, 정수기 등을 파는 회사인데 거기 다녔어요. 집집 다니면서 점검해 드리는 일이었어요.

기자: 일하고 공부하고 집에가면 밤 11시가 되는데 힘들지 않으셨나요?

황재경: 첫번째는 제가 하고 싶은 것이 있었고 남한사회란 것이 공짜가 없더라고요. 내가 공부를 하니까 성적이 오르고 일을 하니까 거기에 보상으로 월급이 있고 집을 방문하면 좋은 고객들이 많았어요. 수고 한다 열심히 산다 이런 분들에게 힘을 얻었고 학원에는 어른들이 야간반에 많았는데 그분들을 보면서 여기서 태어난 분들도 이렇게 힘들게 사는 구나 하면서 이젠 잡혀갈 염려는 없으니 내가 하는 것만큼 내가 얻을 수 있다 이런 생각에 했건 것같아요.

탈북해 중국에 있으면서 공안에게 잡혀 세번이나 북송당한 기억이 있어 힘들었는데 이젠 자유롭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살고 있습니다. 혼자 힘들 때도 있었지만 옛날 북한에서나 중국에서처럼 배고파서 또는 공안의 눈을 피해 숨어살아야 하는 처지가 아니라 좋았습니다.

기자: 힘들때 고비의 순간을 넘길 수 있었던 해결 방법은 어떤 것이 있었나요?

황재경: 저는 노래방에 가서 한시간 반정도 미친것처럼 노래를 불렀던 것같아요. 그러면 좀 괜찮아지더라고요. 심수봉의 사랑을 할꺼야 사랑밖에 난 몰라 그 노래가 좋았어요.

심수봉-사랑밖에 난 몰라 : 그대 내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땜에 내일은 행복할거야…

29살까지 일하면서 학원다니고 검정고시를 준비했습니다. 이제 두 아이의 엄마로 그리고 대학졸업을 앞두고 있는데요. 황 씨는 돌아보면 정말 정신없이 살았던 그런 시간이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황재경: 그때의 행복은 이렇게 하면 대학을 갈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제가 북한에서 초등학교 4학년 다니고 중학교 2학년 즈음에 너무 힘든 상황이 있었는데 집에서 12살 어린 동생을 돌보면서 살림을 하고 엄마는 밖에 나가 돈을 벌었는데 검정고시 공부를 하면서 학교에 가려는 열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는데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현실이 되고 목표가 됐던 것같아요. 그리고 제가 일할 때 보면 팀장님이 혼자 애를 키웠는데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됐어요. 그것을 보고 북한처럼  당원이어야 하고 토대가 좋아야 하고 이런 것이 없어도 여긴 속된말로 과부혼자 아이를 키워도 의사가 될 수 있는 환경이 돼있는 것 같아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황재경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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