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사랑 그 끝은 어딜까?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20-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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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시 임진각 망배단에서 한 시민이 철조망 사이로 북녘을 바라보고 있다.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 망배단에서 한 시민이 철조망 사이로 북녘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누군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자신이 갖은 모든 것을 주려고 한다면 어떨까요? 배가 고프다면 먹을 것을 주고 살기 힘들어 하면 어떻게 해서든 경제적으로 도와주고 싶어 안달이 납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하겠지만 우리의 어머니가 그렇다고 한다면 모두 고개를 끄덕일 겁니다. 오늘은 남한생활 13년차 장해연(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장해연: 나는 바라는 것이 없어요. 몸만 이대로 더 유지를 해서 북한에 있는 아들을 좀 더 도와주고 싶은데 그게 제일 걱정이에요.

80살을 바라보는 노모가 북한에 있는 아들을 걱정합니다. 1년전부터 아들과 전화연락 조차 끊겨 무슨 일이 있는지 오매불망 아들에게 소식이 오길 기다리고 있는데요. 장 씨는 현재 무릎 연골 수술을 받아서 거동이 불편한 것이 맘에 걸립니다.

장해연: 북한보다 살기도 좋고 생활도 괜찮고 한데 저는 몸이 많이 아파요. 수술도 4번했고 심장 시술도 하고 가슴에 철심도 꼽았고 그래서 생활하는 데서 좀 제가 아픔을 많이 느끼고 있어요. 다니는데도 불편하고요.

기자: 북한에서부터 원래 몸이 안 좋으셨습니까?

장해연: 여기 와서 알았어요. 북한에서 지금껏 있었으면 죽었죠.

기자: 탈북하기 전 북한에선 무슨 일을 하셨는데요?

장해연: 북한에서는 도자기 공장에서 올 때까지 40년을 일했어요. 그러니까 너무 힘들게 일하다 갑자기 놀아서 그런지 또 중국에 와서 4년 있는 동안도 일했고 그래서 몸이 많이 쇠약해진 것 같아요.

북한에서는 민족의 반역자로 남한에서는 탈북자란 이름으로 살지만 장 씨는 누구 보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고향을 떠난 것은 예순이 넘은 나이에 먹고 살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장해연: 생활하기 너무 힘들었어요. 미공급 쌀을 주지 않고 해서 두만강 옆에 있는 곳에 친척 도움을 받자고 갔는데 친척이 다 한국을 가고 없어서 1년동안 그곳에서 나무도 해서 팔고 쌀을 넘겨 받아서 또 팔기도 하고 그러다가 돈이 없으면 장사하기도 힘들고 쌀장사 하던 것도 단속을 해서 못하고 해서 넘어왔어요.

그렇게 지난 2001년 탈북을 해서 중국에 갔는데요. 돈을 벌어선 다시 북한으로 돌아오자고 맘 먹고 갔는데 막상 중국에 가서 그의 눈 앞에 벌어진 세상을 경험하고는 생각이 또 좀 달라졌습니다. 다시 돌아간들 먹고 살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었던 탓에 현실을 받아들였던 거죠.

기자: 북한에서는 당원이었고 40년을 일했는데도 살기가 힘들었군요?

장해연: 그런 사람들이 더 못살고 더 굶어 죽고 그래요. 당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 충성을 했기 때문에 저는 장사할 줄도 몰랐어요. 오직 공장에 매달려서 작업반장을 했어요. 60명 넘게 데리고 반장했어요. 내가 나가지 않으면 반원들이 다 어떻게 될까봐 저는 계속 굶어도 공장에 나가고 그랬어요.

나라경제가 어려우니 보답은커녕 앞으로 살길조차 막막해졌고 그래서 중국에 갔던 겁니다. 이미 탈북해 중국에 있던 딸은 북송을 당했고 계속 신분을 숨기고 중국에 산다는 것도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던 차에 딸이 다시 도강해 왔고 이제 모녀는 탈북자에게 집도 주고 정착금도 지원한다는 남한 행을 결심합니다. 그리고 지난 2007년 남한에 안착합니다.

장해연: 달라졌죠. 그저 생활하기는 먹을 것이 흔하고 입을 것이 흔하고 많고 그러니까 살기는 괜찮은데 우리는 북한에서 이웃이 다정했어요. 먹을 것이 없으면 호상주고 받고 그랬는데 여기는 그런 것도 없고…

60년을 북한에 살다 처음 접한 자본주의 남한사회가 편할 순 없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는 눈으로 확인하고 피부로 느낄 수 있었지만 낯선 곳에서의 첫발은 어색할 수밖에 없었죠.

장해연: 그저 가정부로 일해봤고 그 다음 식당 가서 알바를 해봤고 그랬어요. 나이가 있다고 다 안받아 줬는데 그래도 식당에 있는 사람이 내가 북한에서 왔다고 하니까 받아줘서 한 두 달 다녔어요. 그리고 아이 보는 일도 했고 가정부 일은 1년 반을 했어요. 그래서 브로커 비용도 1,200만원을 물어야 했는데 딸이 번 돈하고 합해서 브로커 비용도 갚았어요.

기자: 그래도 짧은 기간 미화로 하면 1만달러 정도의 돈을 벌어서 빛을 갚았네요.

장해연: 네, 그래도 다행이죠. 돈을 벌어서 내 손에 쥐니까 정말 좋았어요. 내가 힘들게 일해도 여기서는 가정부 일도 계속 일하는 것이 아니고 앉아서 쉬기도 하고 그 집에서 주는 간식도 먹고 하면서 120만원을 탔어요. 그리고 정착금도 타고 하니까 정말 좋았어요. 돈을 타니까 내 맘대로 쓰기도 하고…

대부분의 탈북자는 제3국을 통해 남한에 가기까지 누군가의 안내가 필요합니다. 소위 말하는 탈북 브로커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요. 제3국에서 남한에 도착하기까지 교통비와 숙식에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길안내에 대한 비용을 한국에 도착해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됩니다. 장 씨도 딸과 함께 모은 돈으로 탈북 비용을 다 갚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졌는데요. 아무리 일이 힘들어도 북한에서 했던 것과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장해연: 남한에 오니까 내가 북한에서 일한 것처럼 했으면 부자 됐겠는데 저는 북한에서 몇 해 동안은 배급도 안주고 돈이 없는 일을 했어요. 같이 온 딸이 장사를 해서 먹고 살았어요. 어리지만 딸이 국수 1kg을 받아 가지고 국수 말아서 팔아서는 먹고 살았어요. 북한에서 살은 이야기를 말하자면 어떻게 다 하겠어요.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들 그렇게 살았으니까……

조금만 더 젊었을 때 북한과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많습니다. 평생 너무 힘들게 일해서 몸은 다 망가져 마음처럼 움직여주지도 않고 새로운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하지 못하는 것이 답답하기 때문입니다.

장해연: 그래도 당에 대한 충성이었는데 몽골에 와서 김정일 요리사라는 책이 나왔는데 일본 사람이 쓴 책인데 그것보고 놀았어요. 정말 놀랐어요. 내가 저런 사람을 위해 충성했는가 하고 후회도 많고 너무 놀라고 울기까지 했어요.

장 씨가 말하는 남한세상은 한마디로 자유롭다는 겁니다. 그 누구에게도 통제를 받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남한사람들이 당연하게 누리고 사는 것에 대해서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장해연: 놀랐어요. 우선 집안에 물이 다 있고 북한에서는 물을 다른 곳에서 길어오고 했는데 더운물 찬물 다 나오고 목욕도 언제든 하고 또 모든 것이 다 풍부하잖아요. 북한에선 빨래비누도 없어서 힘들었는데 여기는 세탁기가 돌아가지 하니까 어떻게 비교를 하겠어요.

기자: 아무리 남한이 살기 좋다고 해도 먹고 살수만 있었다면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장해연: 네 그게 맞아요. 어쩌면 고난의 행군만 없었으면 내 고향인데 살았죠. 남편이 암으로 죽고 아이 둘을 키웠어요. 그때는 일하면 일하면 월급 다 주고 거기도 우리 정도 나이 되면 거기도 배려 받고 다 살아요.

매일 쌀밥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한답니다. 특히 올해는 북한 식량사정이 안 좋다고 하는데 아들은 어떻게 끼니를 거르지나 않나 걱정입니다.

장해연: 그래도 생계비 나오잖아요. 그 생계비를 세금 제하고 나면 한 30만원 정도 남아요. 쌀도 수급자니까 줘서 안 사먹고 하니까 100만원 정도 모이면 또 송금하고 병원 치료비도 무료고 하니까 아무 걱정도 없어요. 몸만 이대로 더 유지를 해서 북한에 있는 아들을 좀 더 도와주고 싶은 생각밖에 없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남한생활이 13년차가 되는 장해연(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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