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코디언과 나의 인생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9-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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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7년 탈북예술인총연합회(NK예총) 창립식에서 김영남씨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다.
지난 2007년 탈북예술인총연합회(NK예총) 창립식에서 김영남씨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항상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하는 인생을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북한에서 청년예술단장으로 활동하다 남한에서 아코디언 연주자로 그리고 작곡가로 성공한 탈북민이 있습니다. 바로 김영남 씨인데요. 김 씨가 남한에 가서 어떻게 새로운 인생을 펼치게 됐는지 전해드립니다.

김영남: 1998년 온 가족이 탈북해서 중국에서 살다가 2002년 한국, 서울에 정착하게 됩니다.

평안북도 예술단체장으로 활동하다 가족과 탈북합니다. 어려운 형편의 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최선의 선택을 했던 겁니다.

김영남: 97-98년 북한에서 제일 많이 굶어 죽었는데 저는 신의주에서 먹고 살 수는 있었는데 나라가 돌아가는 것을 보니 나중에 저희도 험한꼴을 당하지 않겠는가 또 북한이 그때 당시 전기도 안들어오고 밖에 나가면 전부 강도고 그랬어요. 그래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 생각해서 37살에 압록강을 넘었어요. 지금 58살이니 북한에서 오래 살았죠. 기본 청춘을 거기서 받쳤고 사회생활도 하다가 오게 된거죠.

북한에선 나름대로 평탄한 생활을 했지만 사회전반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외부소식을 듣고 생각이 많아지던 차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고 탈북을 결심합니다.

김영남: 그때는 kbs 사회주의 방송하고 중국에서 자유아시아방송도 들었던 것 같아요. 다른 북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다같이 먹고 잘살고 이런 것에 대해 생각이 많았어요. 자본주의에 대해 잘은 몰랐지만 사람들이 일하기 싫어하고 사람들이 도시에 정착하려고 하고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대로 농장에서 일해야 하다보니까 사람들이 일을 안합니다. 사람은 능력에 따라서 일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북한에선 땅과 모든 공장시설을 국가에서 소유하고 통제를 하니까 개인이 의욕을 잃고 열심히 일을 할수 있는 상황도 아닌 거예요. 남한에 와서도 마찮가집니다. 저는 열심히 일해서 소득을 높이고 할 때 못사는 사람들에게도 좀 나눠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단순히 머리속으로 상상만 하는 것과 직접 경험했을 때의 느낌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요. 탈북해 중국에서 한 번 놀랐고 다시 남한 땅을 밟았을 때 충격을 받습니다.

김영남: 일단 중국에 넘어왔을 때는 중국도 그렇고 한국도 잘산다는 것을 알았어요. 라디오 방송을 많이 들었으니까요. 중국에 일단 넘어오니까 전기도 계속 오고 항상 수도에 물이 나오고 밖에 나가도 먹을 것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한 것을 봤어요. 그런데 중국은 위생적으로 좀 안좋았는데 인천공항에 내려보니까 깨끗하고 차가 많고 그런 것에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움 반 기대반이었는데요. 뭔가 한 번 큰일을 낼 수 있을 것 같은 흥분을 감출수 없었습니다.

김영남: 일단 한국에 오면 여긴 민주주의 국가이니까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고 여행의 자유, 직업의 자유 모든 것에 해방됐다는 것을 알았고 비행장에서는 잘 몰랐는데 민주주의 국가니까 자기 마음대로 펼칠 수 있는 것은 알았죠.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을 다시 실감을 한거죠.

김 씨가 남한땅에 첫발을 내딛던 2002년은 남한사람들에게는 광란의 한해였습니다. 바로 월드컵 축구 4강 신화를 달성하면서 국민 모두 오, 필승 코리아 응원가를 부를 때였으니까요. 모두가 똘똘 하나로 뭉쳐 한모습으로 보일 때였습니다. 그래서 북한 출신인 자신이 그 틈을 비비고 들어서 섞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죠.

김영남: 처음에 한국에 와서 어떻게 하면 성공할 것인가 자아를 실현할 것인가 고민했어요. 남한사람이 모든 분야를 다차지 하고 있는 거예요. 북한사람이 여기오면 정착하기가 어렵거든요. 왜냐하면 자본주의도 모르는데다가 언어도 다르고 제일 어려운 것이 모든 기술적분야가 세분화 돼있고 세계화 돼있잖아요. 처음에 한국에 와서는 남한사람들의 바닥생활이 어떤 것인지 해서 슈퍼에서 우유배달도 6개월 동안 해보고 그랬습니다. 남한정서도 알고 돈을 벌려면 어떻게 고생을 해야 하는지 하는 막일도 했고요.

김 씨의 발길은 음악소리가 나는 곳으로 끌렸고 그곳에서 제일 갖고 싶은 것은 단연 북한에서 고급 악기였던 아코디언이었습니다. 거금을 들여 산 아코디언은 새로운 남한생활의 출발점이 됩니다.

영남: 서울 종로 3가에 낙원상가가 있는데 거기는 악기 배달점이거든요. 처음에는 제가 북한에서 피아노도 좀 쳤고 아코디언도 하고 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피아노 조율을 배워서 6개월 일했어요. 북한에는 피아노가 없지만 여기는 집집마다 피아노가 없는 집이 없거든요. 그런데 제가 일할 때인 2002년 시장이 많이 위축이 됐어요. 그래서 직업을 좀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때 악기점을 보니까 굉장히 비싼 아코디언이 많았어요. 한 번 만져보자 하니까 그러라는 거예요. 제가 북한에서 마지막 아코디언을 한 것이 15년 만이었는데 내가 좀 하니까 직원이 갑자기 선생님이라고 하면서 이 길로 나가면 좋겠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갑자기 아코디언을 사게됐어요. 처음에는 돈이 별로 없었는데  650만원이니까 한 6천불이 되는데 이태리 제품을 가지고 싶어서 무작정 샀습니다.

6천 달러나 하는 아코디언을 가지고 두 달정도 열심히 연습을 하니 15년 전의 기량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자신이 북한에서 옛날에 연주하던 느낌을 받았던 겁니다. 자심감을 얻었고  본격적으로 작곡가이자 연주자의 생활을 합니다.

김영남: 인터넷 강좌가 있는데 음악하는 분들이 싸이버상에서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싸이트입니다. 선생님들만 해도 300분이 됩니다. 피아노, 성악, 기타, 아코디언이 있는데 거거서 강좌를 만들었어요. 15년 전이죠. 저는 잘 모르지만 제주도부터 해서 저한테 배운 사람이 몇천명이 됩니다. 미국에도 있고 호주에도 있고요. 인터넷으로 하니까 돈을 내고 배울 수가 있잖아요. 종로에도 제 아코디언 학원이 있어요. 그런데 한 3개월 전에 교수직 들어온 거예요.

항상 음악과 함께한 김 씨는 2020년부터 대학에서 아코디언을 강의를 하게 됩니다.

김영남: 북한에서 와서 이제 17년됐는데 58살이 됐습니다. 조금 일찍 교수가 됐었더라면 좋았겠는데 개인적으로 나중에 아코디언과가 생겨서 아쉬움은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부족한 것은 보충 하고 최선을 다해 한국 아코디언 발전에 기여하겠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아코디언 연주가 김영남 씨의 남한생활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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