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의 편지: 북에 있는 어머님께 드리는 편지

남한에 정착한 탈북 언론인 한민(가명)씨가 역시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을 만나 이들의 애환을 들어보는 ‘탈북자의 편지’ 순서입니다. 오늘은 2006년 6월에 한국에 온 이수희(가명-여자,27세)씨가 북한에 살고 있는 어머님께 드리는 편지입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어머니품을 떠난 지 10년만에 어머님께 편지를 드립니다. 혼자서 두 딸을 키우시며 고생 많으신 어머님께 효도한번 제대로 못하고 멀리서 걱정만 합니다. 1996년 여름에 중국 가서 돈 좀 벌어오겠다던 언니가 10년 세월 행방불명되어 괴로웠는데 제가 남한에 와서야 언니 소식을 알게 됐습니다.

언니는 지금 태국이란 나라에서 남한으로 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언니인들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겠습니까! 어머님께 두 달 모두 이젠 남한에서 잘 살게 됐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언니를 찾겠다고 중국 땅을 헤매다가 흑룡강성의 산골에 끌려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이집 저집 팔려 다니며 살다보니 내 처지에 언니를 찾은들 앞으로 살아갈 무슨 방도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고통도 있지만 그래도 북한에서처럼 먹을 걱정, 입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더군요.

아마 언니도 저처럼 수모를 당하며 어딘가에 숨어살았겠죠. 가슴조이며 피해 달아나고 도망가다 붙잡혀 매 맞고 돈도 받지 못하고 일하면서 10년 세월 어둠침침한 공간에서 불안에 덜며 지내 보낸 우리자매의 눈물겨운 이야기는 수많은 탈북자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저는 남한생각을 전혀 못 해 봤다는 것입니다.

한국이란 말도 들어볼 수 없는 환경속에서 제가 남한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2002년 6월에 할빈역 근처에 있는 상점에 갔다가 어느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우리말소리를 듣게 되어 가보니 텔레비전에서 축구를 하는데 우리나라 말이 나오더군요. 너무 오랜 세월 들어보지 못했던 말을 들으며 눈물이 나왔고 기쁘고 좋아서 한참을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남조선이 <대한민국>이란 국호로 불리우며 중국에 온 탈북자들은 바보가 아닌 이상 대한민국이란 나라로 간다는 걸 조선족들로부터 알게 되었습니다.

언니 찾아 나선 비극의 길의 끝이 남한정착으로 된다면 고향에 게시는 어머님도 마음을 놓으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도망갈 기회를 보다가 어느 겨울 한밤중에 열차에 몸을 싣고 1주일을 꼬박 갔더니 중국남방지대 곤명이었습니다. 열대지방에 익숙치 못해 처음엔 애를 먹었고 그곳에서 베트남 국경으로 넘어가는 문제를 고심하던 끝에 저는 중국공안에 체포 되어 왔던 길을 되돌아 북한으로 북송되었습니다. 북한에 가서 조사받을 때 수모도 많이 받았습니다. 노동단련대 생활까지 마치고 집에 가보니 어머닌 너무 억이 막혀 하셨죠. 언니라도 제발 살아서 좋은 곳에 가서 잘 살아갈 것을 빌었습니다.

당시2003년 봄인데 식량사정이 어려워 젊은 사람들은 여기저기 방황하며 식량구입을 다닐 때입니다. 어머니는 앉아서 죽느니 차라리 두만강을 건너가라고 하여 저는 다시 탈북을 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중국으로 와서 연길, 장춘, 목단강, 심양, 북경 등 도시들을 헤매며 언니를 찾았으나 언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텔레비전를 통해 남한에 대하여 접하게 되었고 남한사람들과 직접 대화도 하면서 저의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 후 저는 2006년6월에 남한으로 오는데 성공했습니다. 저의 남한 행에 도움주신 여러분들께 감사했습니다.

태국을 경유해서 남한에 온 탈북자들이 저에게 언니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언니도 남한으로 들어오게 된답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바라시던 대로 우리 자매가 무사히 남한 땅에 오게 됩니다. 이 길을 오려고 10년 동안 먼 곳까지 헤맸습니다.

북한에 어머니와 같은 주민들이 자유를 보장받는 제도가 설 때까진 다시는 조국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습니다. 시들어가는 고향만이 불쌍합니다. <조국은 곧 장군님의 품>이라고 북한에서 교육받으며 살았는데 그런 엉터리는 미개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도 안 통합니다. 남한에 와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느껴보니 참 사람살만한 세상이란 생각이 듭니다.

조국이란건 내가 태어나고 조상의 넋과 나의 추억이 배어있는 마을의 뒷동산 같은 다정한 공간같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머니,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이 딸은 열심히 살겠습니다.

건강 주의하셔서 오래오래 살아계셔야 합니다. 언니 만나면 그때 다시 소식 전해 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시보시요.2006년7월19일. 남한에서 둘째딸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