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 북한 청진시에 살고 있는 친구들에게


2006.05.31

남한에 정착한 탈북 언론인 한민(가명)씨가 역시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을 만나 이들의 애환을 들어보는 ‘한민의 탈북자가 만나본 탈북자’ 순서입니다. 북한 함경북도 청진시에 살다가 2001년 겨울에 탈북하여 2004년에 남한에 온 황경순 (여자, 28세. 대학생)씨가 북한 청진시에 살고 있는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보고 싶은 나의 동무 앵두와 올챙이에게.

불러보고 싶은 이름을 못 부르고 어차피 별명으로 불러야 하는 비극이 우리의 현실이구나. 너희들과 헤어진 지 5년,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걱정도 된다. 앵두와 내가 다툴 때면 올챙이 네가 가운데서 속상해 울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난 지금 너희들이 믿어지지 않을 곳에 와서 살고 있단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사람 못 살 지옥이라던 남한에서 살고 있어. 자유롭고 부유하고 줄겁다는 건 표현이 모자랄 정도야.

2001년1월에 내가 온성으로 갈 때 앵두 네가 말했지? “온성사람들은 중국에 다니면서 장사한다구” 올챙인 “중국으로 간다는건 조국반역자가 되는 범죄의 길이라고 했지.

그래, 난 너희들 말처럼 조국반역자가 됐고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는 지금의 행복을 뺏기고 싶지 않아!

해마다 청년동맹에서 의무적으로 진행하는 10대원칙통달경연이나 문답식학습경연때 마다 우리 셋은 우수생으로 당선되곤 했지만 그것이 누구에게 필요한 짓인지 그땐 몰랐지만 이젠 알았어. 난 적어도 그런 노예같은 삶은 죽기보다 싫어. 너희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긴 상태로 살고 있어.

너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오늘 내가 여기까지 온 노정을 간단히 추려서 알려줄게. 꼭 참고되리라고 믿고 말이야. 2001년1월 남양지역의 두만강이 꽁꽁 얼었을 때, 달도 없는 야밤에 난 중국으로 왔어. 돈도 벌고 장사밑천도 얻어가지고 돌아가려고 중국에 왔으나 점점 생각이 달라졌어.

나같이 23살 처녀의 몸으로 중국 오면 인신매매꾼들에게 잡혀 팔려갈 위험이 많아. 중국농촌의 능력 없는 총각들은 몇 천 위안에서 1~2만 위안으로 조선 여자들을 구매하는거야. 나이는 관계 없어. 늙어서 허리 꼬부라지기 전까지는 눈에 보이는 조선 여자라면 닥치는 대로 상대로 택한다.

다행히 난 길림성 용정시에 있는 조선족 교회집사언니를 만나게 되어 그 언니의 도움으로 장춘 시에 와서 숨어 살며 낮에는 그 언니와 식당일을 하고 밤에는 그 언니네 집에서 한국 텔레비전을 보았어. 처음엔 모든 것이 신비했고 먹을 것 이 넘쳐나고 화려한 도시와 거리에 기가 죽었었는데 점차 익숙해지더라.

그렇게 2년간 생활하니 어느덧 나도 중국말로 간단히 대화할 수 있을 정도가 됐어. 중국에서 조선 사람들을 탈북자라고 하는데 우선 중국말을 모르면 쉽게 발각되고 아무런 활동도 못해. 그래서 열심히 중국말을 배웠어. 중국에 와 있는 탈북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해. 그 중에 여자가 70%나 된다고 해.

앵두야, 올챙이가 겁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라 너무 세뇌 되서 그런 거야. 내 생각엔 너도 중국으로 가고 싶어 했다고 알고 있어. 겨울엔 두만강이 얼어서 넘어오기 쉽고 얼음이 풀리면 봄, 가을에 물 건너기가 쉽다고 해. 3~4월과 7~8월은 물이 불어나서 너무 깊어 어려우니 참고해라.

중국에 넘어 오면 우선 교회를 ?아 가라. 건물정면이나 지붕 위에 십자가를 세운집이야. 그곳에서 도움 받아라. 난 2004년 여름에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중국남방지역을 거쳐 베트남으로, 그곳에서 태국으로 가서 다시 서울로 왔어. 조선에서 무지하게 앉아서 병신처럼 살다 죽느니 차라리 죽음을 각오하고 인생환의 결단을 할 필요도 있다고 봐.

내가 여기 남한에 와서 살아보니 참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어.

입고 싶은 옷도 제대로 못 입어보고 배고프고 슬픈 일만 많은 조선에서 지금도 고생할 너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중에 이런 말보다 더 중한 말이 없다고 생각했어. 만약 온다면 부모형제 모두 같이 오면 그 이상 행복은 없을거야.

물론 위험해. 자유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실제 체험했어.

작년에 난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화려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했어. 고향사람들과 부모, 형제는 없었어도 모두 진심으로 나를 축하해 줬어. 그때 고향생각이 나서 울었어.

남편되는 사람은 화가이고 참 좋은 사람이야. 날 많이 사랑해 줘. 참, 너희들도 결혼했을 수 있겠다? 조선에선 여자25살 이면 시집가는 것이 상례란 걸 알아. 아무튼 언젠가는 만날 날이 오겠지. 그때까지 억세게 살아서 꼭 고향에서 만나자. 난 여기서 행복한 순간마다 고향을 생각해.

굶어죽은 우리 부모님과 열차사고로 저 세상 간 우리 오빠가 못 누린 자유를 내가 모두 합쳐서 마음껏 누릴거야. 너희들의 다정한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별명을 불러 미안하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안녕히."

남한 서울에서 황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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