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날, 서울시내 꽃 가게들은 카네이션 꽃을 파느라 바쁜 모습이었습니다. 부모님에게 드릴 카네이션 꽃들을 손에 들고 퇴근길에 오른 사람들의 모습과 앞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고 다니는 어르신들을 바라보며 저는 고향에서 카네이션 꽃 한번 앞가슴에 달아 보시지 못하고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아름답고 향기 그윽한 꽃바구니를 받을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며 집으로 갔습니다. 꽃바구니를 들고 저를 기다리고 있을 애들의 모습을 그려 보니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바쁜 사위도, 출가한 딸도, 이제 겨우 걸음마를 떼는 손녀도 집에 와 있었습니다. 저는 자식들의 정성어린 사랑이 담긴 카네이션도 받았고, 용채 돈도 받았습니다.
저는 이번 어버이날을 색다르게 추억하고 싶어서 아이들과 함께 서해 바다 오이도로 갔습니다. 오이도에서 우리는 유명하다는 굴밥을 점심으로 먹은 다음, 대부도로 차를 타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넓은 바다를 막아 만든 시화호를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약 10키로미터가 넘는 대부도를 달리며 넓은 바다를 가로 질러 세계 최대 시화호 조력발전소를 건설하는 우리의 노동자들의 장엄한 모습도 보았고 시화호 물을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도록 건설해 놓은 시화호 관문도 보았습니다.
저는 바다를 가로질러 지나가는 송전선 철탑을 보고도 또한번 놀랐습니다. 50미터 간격으로 쌍을 이루어 세운 송전선 탑을 보며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 고향인 북한에도 세계에서 으뜸이라는 크고 웅장한 서해 관문이 있다는데, 비록 직접 가보지는 못했어도 티비나 사진으로 많이 보았습니다. 서해 관문은 열악한 환경조건에서 북한의 군인들이 건설하며 많은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외국 사람들은 서해 관문을 관광할 수 있으나, 북한 주민들은 마음대로 관광을 할 수가 없습니다. 평양에서 남포까지 차를 타고 2시간이면 갈 수 있지만, 자유로운 왕래가 허락되지 않는 북한인지라 저는 서해관문에 한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대부도에서 바다낚시로 물고기를 낚아서 회를 처먹을 요량으로 낚시터로 갔습니다. 돈을 내고 낚시터에서 5시간이나 보냈지만, 한낮이라서 그런지 고기 한 마리 잡히지 않았습니다.
서운한 마음에 식당에서 광어회로 저녁을 먹고 저녁 8시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올해 어버이날 추억거리를 만들었습니다.
사위와 아들, 딸들을 떠나보내고 서운한 마음으로 있는데, 한 마을에 사는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친구 집으로 갔습니다. 친구도 '어버이 날'이라 식구들과 저녁을 함께 먹었다고 했습니다. 친구와 저는 하루 종일 있었던 즐겁고 이야기로 한참동안 웃고 떠들었습니다.
어디선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싱그러운 아카시아 꽃향기를 맡으며, 우리는 지난 추억을 떠올렸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님이 만들어 주시던 아카시아 꽃 떡을 서로 많이 먹겠다고 동생들과 다투던 일이며, 농사철인 이맘 때면 아카시아 꽃을 뜯어 밀가루와 섞어 아카시아떡을 만들어 먹던 일.... 지금은 아련하게 떠오르는 고향에서의 추억을 얘기하며 우리는 웃다가 울다가 그랬습니다.
늦게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누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같은 날, 북한에 자식들을 두고 온 분들은 얼마나 그립고 마음이 아플까? 얼마나 쓸쓸하고 괴로울까?'라고 말입니다.
제가 남한에 살면서 항상 기쁘고 자신감이 있는 것은 바로 금쪽같은 자식들이 항상 내 곁에 든든하게 있기 때문입니다.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항상 자식들이 내 곁에 있고 그런 자식들을 저도 지켜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합니다. 식구가 한명씩 늘어나는 것도 행복하고 부자가 되는 듯합니다. 무엇보다도 자식들이 저에게는 큰 재산이랍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남북한 주민들 모든 가정에 영원한 행복과 건강만이 있기를 기원하며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