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로 창립 50주년을 맞은 조총련, 즉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하루 전인 24일 도쿄에서 창립기념식을 가졌습니다. 1955년 5월 25일 도쿄에서 초대의장인 한덕수를 중심으로 결성된 조총련은 초기에는 북한으로 막대한 지원을 받았지만 70년대 중반부터 민단전향이 늘면서 숫자가 줄어든 데다 최근에는 자금력의 약화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장균 기자와 함께 조총련 50년의 변화를 살펴봅니다.
조총련이 창립 50주년을 맞으면서 나름대로 다채로운 행사를 치루고 있는데요, 어떤 행사들인지 먼저 소개해주시죠.
이장균 기자: 네, 우선 창립기념일 하루 전인 24일, 도쿄 캐피털도큐호텔에서 2천여 명의 지역대표들과 간부들, 조총련계 대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기념식을 열었습니다. 오후에는 일본 정계, 사회계 인사들을 초청해 기념연회를 갖기도 했습니다만 이날 오전 창립식에는 일본정부대표는 물론이고 사민당, 공산당 대표도 불참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창립기념행사는 지난 13일부터 시작돼서 다음달 19일까지 조총련 지방본부에서 순회 기념식과 연회가 지속적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요행사들이 대부분 비공개로 언론취재도 허용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24일 창립기념식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자민당 총재자격으로 축하메시지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어떤 내용인지 전해주시죠.
이: 21일 아사히신문은 조총련이 서만술 의장 명의로 고이즈미 총리에게 24일 창립기념식에 참석해 달라는 초대장을 보냈다고 보도했는데요, 지난해 조총련전체대회에 자민당 총재 명의로 메시지를 보내 북한과 일본의 국교정상화에 대한 의욕을 보였던 고이즈미 총리가 이번에는 상당히 고심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창립기념행사에 참석하거나 메시지를 보낼 경우 납치피해자 가족의 강한 반발을 부를 수 있고 외교적으로 미국 등 우호국을 자극하게 된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고이즈미 총리는 결국 참석은 하지 않고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전해진 가운데 AFP통신은 고이즈미 총리가 메시지에서 조총련이 국제사회를 위협하는 북한의 핵무기개발 중단하는데 도움이 돼 줄 것을 요청했다고 전했습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어 일본인 납치피해자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해명을 거부하고 있는 북한을 비난했다고 통신은 전했습니다.
50년 역사를 이어온 조총련이 최근에는 숫자도 급격히 줄고 있는데다 자금난도 겪고 있어 존폐위기까지 거론된다는 보도도 있는데요, 이처럼 조총련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배경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이: 1955년 5월 25일 도쿄에서 초대의장 한덕수와 이계백, 이심철 등 좌익계 청년들이 만든 친북조직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는 초기에는 북한으로부터 교육원조비 명목으로 매년 10억 엔에서 20억 엔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고 이 돈으로 도쿄조선대학과 초중고교, 유치원을 세우고 기업들을 인수하거나 설립해 재일동포들의 생활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일본인들로부터 차별을 받던 많은 재일동포들이 대부분 조총련계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상황이었는데요, 그러나 1974년부터 남한이 재일교포 모국방문을 시작하면서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해 조총련 소속 동포들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또 2002년 9월 고이즈미 총리의 북한방북을 고비로 조총련은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됐습니다. 그것은 일본 반동들의 조작이라며 부정해온 일본인 납치를 김정일 국방위원장 스스로 인정하고 사과했기 때문이죠.
이후 조총련은 북한 정권의 앞잡이, 옴진리교 같은 반사회적인 집단으로 전락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니는 여학생들의 치마가 흉기로 찢기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거기다 도쿄도 등 지방자치단체는 조총련 소유건물에 고정자산세를 부과해 조총련 조직을 압박하기 시작하면서 조총련은 자금난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외국인 등록난에 국적을 조선에서 한국으로, 그러니까 북한에서 남한으로 바꾸는 사람이 급격히 늘고 있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이: 그렇습니다. 조총련계 동포들은 외국인 등록증명서의 ‘조선’을 지우고 ‘한국’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마이니치신문은 납치문제이후 국적을 조선에서 한국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매년 1만 명 가까이 급증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재일 민단에 따르면 20만 명대를 유지해온 ‘조선’국적 소유자는 재작년 말 처음으로 20만 명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또 회비납부와 상공인들의 기부도 크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거기다 상근 활동가들의 급료지급도 힘들어지면서 활동가들의 조직이탈도 가속화 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조총련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면서 활로를 찾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이: 당초 재일동포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조총련은 1959년부터 1987년까지 187차에 걸쳐 9만3천여 명의 재일 동포를 북송시키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요, 그러나 1세대가 대부분 사망했고 경제 불황 여파로 돈줄인 조은신용조합 등이 파산하면서 조직과 자금력이 급속히 약화됐습니다. 납치문제로 인해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하면서 조총련 결성 후 46년간 의장을 역임한 한덕수 의장이 2001년 사망하고 서만술 의장이 취임했지만 조총련의 어려운 상황은 가속화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가운데 조총련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도 북한을 방문한 조총련 간부들에게 조직과 교육개혁을 위해 학습조를 폐지하고 조총련 산하 초. 중등학교에 걸린 김일성,김정일 초상화를 자연스러운 활동사진으로 바꾸라고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조총련 자체도 동포권익운동 단체로 탈바꿈하는 시도를 하는 등 현실적응을 위해 노력하는가 하면 조선학교 교과서에서도 남조선으로 부르던 한국을 대한민국으로 표기하고, 현대조선 혁명사는 현대조선사로 바꾸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에는 민단과의 교류도 활성화 되고 있는데 이러한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많은 제약조건들로 체질자체가 바뀌기는 어렵고 조총련의 변화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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