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끝나지 않은 전쟁] “죽다 살았다”

워싱턴, 서울, 타이페이 - 특별취재팀 nohj@rfa.org
2022.10.19
[기획: 끝나지 않은 전쟁] “죽다 살았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에서 생포된 북한군 포로들
/ AP

19살의 전쟁포로  

 

푸에블로호 나포,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 끊이지 않고 이어온 사건들의 뿌리는 72년 전 시작된 한국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올해 나이 아흔 한 살인 탈북 국군포로 김성태 할아버지는 아직도 72년 전 그날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김성태] 그때가 바로 일요일이요. 그때가 6월이니까 농번기야. 이양 사업도 하고, 거기에 동원되라고 다 나가고 했는데, 북한이 공휴일을 이용해서 전선에 걸쳐서 남침해 들어왔단 말이야. 그러더니 천둥소리가 나는 거예요. ‘, ’.

 

이것이 포 쏘는 소리인 줄 모르고, 평화 시대니까. 아침 9시쯤 되니까 방송을 통해서 외출 나갔던 장병들, 군인들 빨리 자신의 소속 부대로 귀가하라고 했어요. 다시 무기를 손에 들고, 전선에 나가서 싸웠는데, 준비 없이….

 

이야. 25일 저녁때 그저 대추알 같은 소나기가 오고, 먹구름이 끼더니 그거 들입다 퍼붓는데, 길바닥이 미끄럽지, 트럭이 전복되지 정말 아수라장이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박격포와 총격 세례를 마주했습니다.

                                                                                                                 

[김성태] 박격포를 쏘면 구덩이가 1m씩 패이고, 소가 쓰러지고, 사람들이 막 죽어가고, 거기 하사관 학교에서 동원된 사람이 전투를 해봤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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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에서 포격 중인 군인들의 모습 / AP

 

나는 동두천 덕정 여기서 전투하다가 중대장이 부상을 당해서성태야, 성태야하면서 부르더라 말이요. 그 부상당한 사람을 업고 내려오다가 나 역시 부상을 당해가지고. 그래서 6 30일에 전투도 몇 번 못하고 포로가 됐어요.

 

김성태 씨가 열 아홉의 나이에 포로가 된 날은 전쟁 발발 닷새째였습니다.

 

23살의 미군 포로  

 

한국전쟁 당시 미 육군사관학교를 갓 졸업한 마이크 다우(Mike Dowe) 소위.
한국전쟁 당시 미 육군사관학교를 갓 졸업한 마이크 다우(Mike Dowe) 소위.
미 육군사관학교를 갓 졸업한 마이크 다우(Mike Dowe, 왼쪽) 소위는 곧바로 한국전쟁에 파병됐습니다.

 

[마이크 다우] 제가 졸업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졸업 후 바로 전쟁터에 나가야 했습니다. 제가 배속된 24사단에 갔을 때, 저는 제 소대를 언덕에 앉히고 강의에서 배운 대로 소대를 향해여러분을 지휘할 수 있게 돼 기쁘다며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한 병장이 불쑥 일어나서는 "소위님 잘 오셨다" "최근 2명의 소위는 2주 이상 살아남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제 코는 납작해졌어요.

 

스물 세 살의 그가 출동 명령을 받고 향한 곳은 북한 평안북도 운산이었습니다. 

 

[마이크 다우] (1950) 11 2일 밤, 강행군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압록강에서 공격을 받은 남한군 사단을 엄호하기 위해 북쪽 운산으로 밀고 올라가던 중, 중공군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중공군의 공격에 한국군은 운산에서 안주까지 밀려났습니다.

 

[마이크 다우] 우리 소대는 박격포 소대였기 때문에 언덕의 후방에서 북쪽을 향한 채 있었어요. 저는 구덩이 뒤에 텐트에서 제 카빈총을 닦고 있었는데 , , 하는 소리가 나더니 텐트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어요. 이후 몇 시간 동안 전투가 벌어졌죠. 군대 신호용 나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렸고 언덕 반대편에서는 대규모 병력이 밀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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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포함해 백여 명 남짓한 병력이 몇천 명의 중공군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마이크 다우] 우리는 몇 시간 동안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싸웠습니다. 그러나 탄약이 떨어진 이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죠. 제 소대원 중 한 명은 중공군이 공격을 퍼붓는 상황에도 물러서지 않고 그곳에 남아 중공군이 던진 수류탄을 집어서 다시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꽤 오랫동안 맞섰고, 덕분에 저를 포함한 소대원들은 그 전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도중 오른손으로 떨리는 왼손을 천천히 주무릅니다.

 

[마이크 다우] 전투 초반에 제 소대 하사가 총상을 입은 목에서 콸콸거리는 소리가 났을 때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제가 위생병을 데려왔지만,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담담했던 그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집니다.

 

[마이크 다우] 처음에는 전장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것을 봤습니다. 우리는 모두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지만, 우리 중 한 명이 그 사람들에게 미군입니까?”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곧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둘러쌌는데, 바로 중공군이었습니다. 그 후로 우리는 전쟁 포로가 된 겁니다.

 

다우 씨는 평안북도 벽동의 수용소로 이송됐습니다.

 

[마이크 다우] (포로수용소로 이동하는 중에도) 부상자들을 이송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부상자든 누군가가 뒤처질 경우, 그 뒤처지는 사람들의 뒤에서 중공군이 총을 쐈고, 그 사람은 거기서 끝이었습니다.

죽음의 행진을 되뇌는 다우 씨의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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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7월 한국에 파병된 미 제2사단 장병들이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이 수용됐던 북한 벽동의 '5번 포로수용소'를 본뜬 모의 훈련장에서 5시간에 걸친 혹독한 '죽음의 행군' 훈련을 받고 있다. / AP

  

72년 전 기억    

 

함경북도 회령수용소로 끌려간 김성태 씨는 ‘포로수용소에 대한 질문에 깊은 탄식을 내뱉습니다.

 

[김성태] 이 포로 생활이라는 게 정말 사람으로서는 겪어보지 않고는, ….

 

말을 잇지 못하는 김 씨의 눈시울은 붉어졌고, 입술은 떨리기 시작합니다.  

 

[김성태] 그렇게 멸시를 당하면서 거기서 생활했습니다. 자고 일어나서 식사라는 게, 그저 알루미늄 식기에다가 밥을 이렇게 담아주는데 양도 줄이고 하니까 사람이 쇠약해지고.

 

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됩니다.

 

[김성태] 이가 낀단 말이야. 그렇게 벌레가 낀단 말이오. 아침에 일어나서 청소를 하느라 빗자루로 쓸면 한 바가지씩 이가 나와. 영양실조에 잘 못 먹지, 사람들은 야위지, 목욕도 못 하지, 빨래도 못 하지, 야만 생활이오. 야만

 

[마이크 다우] 저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영양실조 질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다리의 뼈와 근육을 볼 수 있었어요.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더 이상 들을 수도 없었어요. 죽기 일보 직전이었죠.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두 전쟁포로의 기억은 72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과 1968년 푸에블로호 나포,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그리고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분쟁의 피해자들은 오랜 시간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RFA는 망각(忘却) 대신 ‘기억의 지속’을 통해 이들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취재: 노정민, 천소람, 박수영, Monique Mai, Lauren Kim

촬영: 이은규, Lauren Kim, Paul Lee

에디터: Nadia Tsao, 박봉현, H. Léo Kim, 박정우, Beryl Huang, Tina Hsu, Brian Tian

그래픽, 웹페이지 제작: 김태이

내레이션: 양윤정

더빙: 이진서, 홍알벗, 한덕인, 김효선

번역: 뢰소영

참고 자료: KBS, SBS, YTN, AP

제작: RFA 

 

  • 취재에 응해주신 김성태 씨와 마이크 다우 씨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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