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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아시아방송 특별기획 ‘ 캐나다에 사는 탈북자들’ 캐나다 정부로부터 난민인정을 받는 탈북자 수가 올해 들어 빠르게 늘면서 이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이들 탈북자는 캐나다에서 어떤 절차를 거쳐 얼마 만에 난민인정을 받게 됐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그 두번째 시간으로 두 아들과 캐나다에 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함경북도 온성 출신의 장서희 씨가 고향을 떠나 캐나다에 갈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전해드립니다.
이진서 기자가 캐나다 토론토 현지를 다녀왔습니다.
전화 벨소리: 지금 올라가고 있어. 집에 올라가려고 엘레베이터 탔다고 …
올해 1월 캐나다에서 난민인정을 받은 장서희 씨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실제 사는 집을 보고 싶다고 졸라서 장 씨가 난민인정을 받기까지 도움을 준 현지의봉사자와 함께 장 씨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장 씨는 기자의 요구에 흔쾌히 응하고 자신이 사는 살림집(아파트)로 우리 일행을 안내했습니다. 같은 탈북자 출신이 아닌 외부인에게 자신의 집을 공개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장 씨가 사는 곳은 조용한 주택가에 있는 그리 높지 않은 다세대 주택. 아파트의 승강기에 오르자 마자 휴대전화로 아들에게 곧 우리가 들어간다고 알려줍니다.
아이들하고 있으니까 집 정리 걱정을 했는데 집이 너무 깨끗한데 언니가 걱정을 했구나…
2층에 사는 장 씨의 집 문을 들어서자 정면에 있는 분홍색 창가림(커튼)이 화사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세사람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푹신하게 생긴 의자가 있고 그 건너편에는 5인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식탁이 있었습니다.
가전 제품 중에 무엇보다 눈이 들어온 것은 현관 옆에 허리까지 올라오는 기계입니다.
이건 뭔가요?
장서희: 김치 냉장고요. 제가 식당일 하면서 12시간씩 일하고 하니까 애들 밥을 제대로 못먹였어요. 큰애가 하는 소리가 엄마 김치만이라도 해놔라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김치를 해놨는데 쉬어 빠지고 하니까 장만을 했어요.
캐나다에 도착하자 마자 바로 식당일을 시작한 장서희 씨는 아침 11시 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12시간을 일하면서 집안일까지 신경을 쓰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난민인정을 받아 정식으로 캐나다 정부가 자신을 받아준다고 판결을 할때까지 불안한 마음으로 가슴 졸여야했기에 힘들게 번 돈을 쓸수는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억척스레 모은 돈은 한달에 미화로 환산하면 2천 달러정도. 난민인정을 받고난 다음 장 씨는 큰 마음 먹고 가구를 장만합니다. 그전까진 식두들이 모두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잤지만 이젠 침대도 샀고 아이들 방에는 컴퓨터 책상까지 들여놨습니다. 그러고 나니 정말 누가 찾아와도 사람 사는 집처럼 부러울 것이 없게됐습니다.
장서희: 제가 나름대로 벌어서 이렇게 해놓으니까 현재로선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북이 고향이라 고향사진 한장 정도 있을 것 같은데 없네요.
아이들은 방에 있나요?
아니요 손님들 온다니까 챙피하다고 다 나갔어요. 이건 내동생 북한에서 찍은 사진이예요. 저희 집에 한 번 초대할께요. 제가 모시기가 민망할 정도네요.
언니 고마워요 초대를 해줘서…
다음날 기자는 장 씨를 집 근처 공원에서 만나 장 씨가 북한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연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2006년 탈북할 때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점점 더했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심했던 것이 1995년부터 2000년까지 많이 죽었습니다. 95년엔 제가 살던 동네엔 가족이 다 죽어서 시체를 처리하는데 동원도 됐고 1차적으로 죽은 사람이 대개 환자, 노인들이었습니다.
1994년 결혼을 했다는 장 씨.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신혼의 단꿈은 잠시 뒤로해야했고 먹고 살기 위해선 무슨일이라도 해야했습니다.
장서희:
저희집은 산 한봉우리를 다 뒤엎어서 농사를 짓고 했습니다. 저는 1994년엔 결혼에서 농장일을 했고 다음해부터 산에가서 농사도 짓고 땅도 일궈서 살았습니다. 제가 제일 힘들었던 시기는 1996년입니다. 하루쯤 굶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막 3일씩 굶었습니다. 사람이 눈뜨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고 그랬습니다. 아이도 있었는데 이러다 다 죽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죽으면 죽었지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가을이 됐는데 개인밭은 도둑질을 못하니까 협동농장에 가서 남편도 그렇고 나도 20대 였는데 젊은 사람들이 패를 지어서 도둑질을 많이 했습니다. 1997년부터는 굶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그때부터 중국으로 가자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장 씨가 살던 곳은 온성시에 속한 마을이었고 중국과의 거리는 산을 넘어 2시간 밖에는 안됐습니다. 남편은 식량을 구입한다며 중국을 오가기 시작했고 처음엔 남편이 그런 일을 하는지 눈치 못챘지만 사실을 알고는 남편에게 크게 화를 내기도 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장 씨는 그때까지도 당의 지시를 어겨서는 안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서희:
우리 인민반에서는 부반장을 하고 초급단체에선 위원장을 했습니다. 초급단체에는 아줌마가 30명 정도 있는데 매일 회의 가고 전 사상면에선 빈틈이 없었습니다. 아줌마들을 앉혀놓고 고난의 행군은 미국이 북한을 경제봉쇄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렵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데 남편이 중국을 오가서 남편과 싸움도 많이 했습니다.
결국 2003년 남편은 중국을 오간 사실이 발각돼 보위부에 잡혀갔고 장 씨도 보위부에 가서 일주일동안 조사를 받고 풀려났습니다. 장 씨는 남편의 얘기가 나오자 금새 펑펑 눈물이라도 쏟아낼듯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지금 남편분은 어떻게 되셨나요? 남편은 정치범으로 잡혀가서 종신형을 받았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청진 수성이라고도 하고 개천이란 말도 있는데 함경북도니까 수성에 갔다고 보고 있습니다. 남편이 원래는 한국행을 하려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마음 아픈 것이 가족 때문에 못갔습니다. 내가 마음이 아픈 것이 그때 조금만 더 알아서 남편에게 가라고 했으면 이런 일이 없을텐데 남편없이는 못살것 같았습니다. 저는 땅도 있었고 농사지어서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가족을 버리고 어딜 간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고 내가 남편을 말렸습니다.
남편의 탈북을 반대했던 장서희 씨 그러나 그는 지금 남편 없이 두 아들과 함께 북한과는 지구 반대쪽에 있는 캐나다에 살고 있습니다. 캐나다에 사는 탈북자들 다음 시간에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인간답게 살고자 애쓰는 장 씨의 마지막 이야기가 방송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