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혁명소조운동과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

김주원∙ 탈북자
2018-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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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조선노동당의 과학연구사업에서 공로를 세운 과학자, 기술자, 교원 등 3대혁명 소조원들에 대한 국가표창식 열리고 있는 모습.
북한 조선노동당의 과학연구사업에서 공로를 세운 과학자, 기술자, 교원 등 3대혁명 소조원들에 대한 국가표창식 열리고 있는 모습.
사진 - 연합뉴스

북녘 동 포여러분 지난 여러 시간 동안 3대혁명소조원들이 진행해온 사상혁명, 기술혁명, 문화혁명에 대해 이야기해 드렸습니다. 1972년 가을에 당조직들에서 선발한 핵심일군들과 대학생들로 지도소조를 경공업부문의 일부 공장들에 처음 파견하였을 당시까지만 해도 김정일은 3대혁명소조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시킬 생각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다음해인 1973 2월에 진행된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확대회의에서 3대혁명소조를 직접 파견할 것을 공식적으로 발기하였습니다. 평양과 지방도시들에 파견된 지도소조들의 활동에서 영감을 받은 김정일은 자기의 손발이 되어줄 지도소조들을 전국 각지에 파견하여 후계세습을 위한 사상공세를 더 강화하려는 욕심이 생겼던 것입니다.

중앙당과 중앙기관이 집중되어 있는 평양시는 북한에서 정수분자라고 할 수 있는 대상들이 거주하고 살다 보니 당정책집행이나 후계 세습 등 정치사상적 측면에서 크게 문제가 없었지만 지방당조직이나 지방정권기관, 그리고 지방주민들은 사상적 면에서나 기술적, 문화적 면에서 유일적 지도체제확립이 확고히 서있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김정일은 지도소조라는 명칭을 3대혁명소조라고 부르도록 하고 이들을 전국 각지에 파견하여 후계세습야욕과 지도력을 확장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당중앙의 암행어사라는 명칭에 걸맞게 3대혁명소조원들의 영향력이 북한사회의 각 부분에서 효력을 발생하자 여기에 만족한 김정일은 1975 11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을 또다시 발기하였습니다. 청취자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북한에서는 새로운 운동이 처음 나오면 우선 시범 단위가 설정됩니다. 천리마운동이 강선제강소에서 나온 것처럼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의 첫 봉화는 검덕광산과 청산리협동농장에서 타올랐습니다.

북한당국은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을 제시하면서 이 운동의 본질에 대하여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를 투쟁 목표로 내세우고 전당과 전체 인민을 조직동원하여 그것을 실현해나가는 가장 높은 형태의 대중 운동이며 사람들의 사상개조사업과 경제문화건설에서의 집단적 혁신운동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힘있게 밀고 나감으로써 혁명의 주체를 강화하고 혁명과 건설을 빠른 속도로 다그치게 하는 우리 식의 독특한 대중운동이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 운동이 시작되자 북한에 주재하고 있던 외국대사관들에서도 관련자료들을 수집하기에 바빴습니다. 당시 몽골 대사는 외교부의 한 일꾼에게 이 운동의 발기자가 김일성 주석인지 아니면 김정일인지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돌아온 대답은 ‘당중앙’이었습니다. 김정일은 1970년대 자신을 ‘당중앙’이라고 부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평양주재 웽그리아(헝가리)대사관에서 자국의 외무부에 보낸 전보전문내용이 20년이 지난 1990년대에 공개되었는데 이것을 보면 당시의 상황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1976 1 24일에 문서 등급 극비로 보낸 이 전문에는 북한에서 새로 시작된 3대혁명소조운동에 대해 ‘당 정책 집행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기술하였고 3대혁명소조원들이 새로 발기된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 수행에서 기본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이 운동은 크게 두 가지에 역점을 두고 있다며 그 첫 번째로는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이고 두 번째로는 가시적인 경제건설성과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모든 주민들이 주체사상 이외의 다른 사상을 알지 못하도록 하여 그들이 당중앙에 완전한 충성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전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북한당국도 이 운동의 중요한 특징에 대하여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의 요구에 맞게 사상혁명을 더욱 힘있게 벌려 사회의 모든 성원들을 주체형의 혁명가로 만드는 대중적 사상 개조 운동이며 공업화가 완성되고 사회주의건설이 보다 높은 단계에 올라선 새로운 현실의 요구에 맞게 인민경제를 현대적기술로 장비하기 위한 대중적 기술 개조 운동이며 완전히 승리한 사회주의사회건설이 일정에 오른 혁명발전의 새로운 단계에서 모든 당원들과 근로자들의 문화기술수준을 높이고 문화적인 생활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대중적 문화 개조 운동이라는데 있다”며, 결국 대중적인 사상, 기술, 문화,개조,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을 벌리는 데서 경쟁적인 분위기를 세우기 위하여 1978년부터는 3대혁명수행에서 모범을 보인 단위들에 3대혁명붉은기칭호를 수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대혁명붉은기칭호를 받는 단위들에는 깃발이 수여되었습니다. 붉은색 바탕의 깃발에는 중심에 하늘을 나는 날개 달린 천리마 위에 3대혁명이라고 쓴 깃발을 든 사람이 있고 이 원형 모형의 위에는 ‘3대혁명붉은기’라는 글이, 아래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라는 글이 노란 색깔의 실로 수놓아져 있습니다. 그리고 기발의 뒷면에는 ‘3대혁명을 힘있게 다그쳐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를 빛나게 실현하자!’는 구호가 새겨져 있습니다.

북한의 모든 공장들은 정문에 ‘3대혁명붉은기쟁취전투장’, 23대혁명붉은기쟁취전투장’, 33대혁명붉은기쟁취전투장’ 등의 구호 판이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이 공장이 아직도 3대혁명붉은기를 수여 받았는지, 아니면 이미 2 3대혁명붉은기 수여단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3대혁명붉은기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의하여 수여되는데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은 북한의 모든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들과 과학, 문화, 교육, 보건부문 등 모든 부문, 모든 단위에서 힘있게 벌어지고 있으며 심지어 군부대들에서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1975 11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 11차 전원회의에서 이 운동을 전 사회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킬 데 대한 결정이 채택되고 며칠 후인 12 1일에 검덕광산에서 궐기모임을 통해 북한의 모든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으로 확산시킬 것을 호소문이 발표되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1976 3월에는 과학토론회를 개최하여 이 운동의 본질적 성격과 특성 및 3대혁명 추진의 이론적 합리성을 체계화하였고 1977 9월에는 중앙과 도, , 군에 '3대혁명붉은기 수여판정위원회'를 설치했습니다.

3대혁명소조원들은 자기가 맡은 단위들을 3대혁명붉은기를 쟁취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초급당위원회와 부분당위원회, 당세포들에 나가 3대혁명붉은기쟁취 결의목표대장을 수시로 검토하고 그 집행정형을 요해하여 상부에 보고하였습니다. 노동당 입당도 파견 기간에 자기가 맡은 단위가 3대혁명붉은기를 수여 받았는가가 중요하게 작용하였습니다. 3대혁명붉은기 판정에서 기본은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의 노작학습정형과 강연회, 해설담화 등 사상학습참가정형 등 사상개조를 위한 사상혁명수행정형이 우선시되었습니다. 그리고 단위들에서 진행된 기술혁신과정과 생산문화, 생활문화 수행정형이 평가되었습니다. 모든 성원들이 한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루어야 하고 ‘공장 구내는 궁전처럼’이라는 구호에 걸맞게 환경관리가 잘되어 있어야 합니다. 간부들과 3대혁명소조원들은 3대혁명붉은기를 쟁취하여야만 승급(승진)과 입당 등 좋은 평가를 받게 되지만 이 운동에서 다른 단위보다 뒤지면 항상 비판을 받고 언제 철직될지도 모를 정도로 사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반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에게는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은 너무도 힘겨운 과정이었습니다.

노작발취집에는 수십 건의 노작들을 공부하고 발취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야 하고 악기를 다루기 위해 작업시간 이외에도 작업장에서 연습을 하여 공연 준비를 해야 하고 생산문화, 생활문화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재 구입과 판정성원들에게 제공되는 뇌물을 위해 돈을 내야 했습니다.

북한의 전 주민들에게 강요되는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삶을 더 좋게 하게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김부자를 신처럼 떠받들도록 하는 사상학습, 사상투쟁을 통해 그들을 영원한 노예로 살아가도록 세뇌시키는 과정이었고 3대혁명소조운동이 이런 노예적인 세뇌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다음시간에는 북한에서 4차에 걸쳐 진행되었던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 선구자대회에 대해 얘기하기로 하고 여기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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