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종교-북한 천주교 역사(1)

김주원∙ 탈북자
2019-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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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 주교들이 평양 장충성당을 방문해 미사를 봉헌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 주교들이 평양 장충성당을 방문해 미사를 봉헌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북녘동포 여러분! 오늘은 지난시간에 이어 북한의 이중적인 종교정책에 따른 천주교의 역사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세계 인구는 약 76억 8천만여 명이며 그 중에 종교인이 51억여 명에 달합니다. 결국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구 3명 중에 2명이 종교인인 셈입니다. 종교인 중에는 천주교, 일명 카톨릭교인이 13억여 명으로 가장 많고 그 뒤로 이슬람교 12억여 명, 힌두교 9억여 명, 불교 3억 8천여 명, 개신교 2억 8천여 명, 동방정교회 2억 4천여 명 등의 순서이며 성공회, 유대교, 자이나교, 일본 신도 등 수백에서 수천만 명의 종교만 해도 수십여 개나 됩니다.

종교인 중에서 가장 많은 천주교인은 전 세계인구의 약 6분의 1로 결국 6명 중에 한 명이 천주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14년 북한인권정보센터에서 출간한 ‘북한종교자유백서’에 따르면 북한의 천주교는 평양 장충성당 1개와 3천여 명의 신자가 있다고 합니다. 개신교인 기독교 신도 1만 2천여 명, 불교 신도 1만여 명에 비하면 종교인 수가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 천주교인이 기독교(개신교)인보다 적은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북한 당국이 체제수호차원에서 교황체제로 지구촌에 존재하는 천주교가 북한에서 신으로 떠받들리고 있는 김씨 일가의 우상화에 걸림돌이 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리고 결혼을 하지 않고 공동체 연합활동으로 집단생활을 하는 신부나 수녀들의 존재가 체제불안요소로 보고 있다는 점도 북한에 천주교가 자리 잡기 어려운 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천주교는 북한지역에서 개신교가 들어오기 전에 먼저 전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801년 신유박해로 천주교 신자 100여 명이 죽음을 당하고 400여 명이 유배를 갔던 사건이 일어났을 때 황해도 평산 출신 고광성과 봉산출신 황포수가 서울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고향으로 이송되어 순교하였던 사실만 봐도 지금으로부터 약 220년 전에 북한지역에 유입되었던 천주교의 위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지역에 집중되어 있던 천주교 신자들이 강원도와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북한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신유박해로 함경도에 유배를 온 11명의 신자들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역 주민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많은 신자들을 양성하였습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선진문화를 지향하는 천주교나 개신교의 존재는 왕족독재국가들에서는 탄압의 대상이었습니다. 현대문명을 자랑하며 발전하는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인간사랑과 나눔, 배려를 통해 공동체의 화목을 지향하는 종교들에 의해 발전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봉건왕족사회나 북한의 김씨 왕족 독재국가들에서는 종교인들에 대한 탄압이 국가체제의 존립에 위험요소로 간주되어 숙청과 처형의 대상으로 되어왔습니다. 1988년 병인박해로 함경도 영흥에서 23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일제의 반종교정책으로 제정된 1915년 8월 16일 ‘포교규칙’으로 천주교활동이 규제를 받으면서 많은 천주교인들이 만주지방으로 이주하기도 하였습니다.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기 전까지만 해도 북한지역에는 천주교의 지방교구들이 설립되어 활발히 활동하였습니다. 1880년대 원산항이 개항되면서 1883년 강원도 안변의 근피골에 160여명의 신자로 최초의 공소가 생겼고 1887년 5월에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신부들의 적극적인 선교활동과 교육활동으로 북한지역의 첫 본당이 설립되어 르메르 신부가 초대 신부로 부임되었습니다. 1920년 8월에 함경도 지역이 서울교구에서 분리되어 원산교구로 설정되면서 독립적인 지위를 가지게 되었고 성 베네딕도 수도회 원장이었던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가 원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성 베네딕도 수도회는 독일의 풋찡 성 베네딕도 수녀회를 초청하여 원산교구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전교와 교육을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1925년 11월에 독일에서 파견된 4명의 수녀들은 원산에 도착하여 지역주민들에 대한 무료진료와 신자들을 위한 교리교육을 진행하였고 해성학교 개설이 이어 어린이들을 위해 첫 유치원인 해성유치원을 개원하였습니다. 북한에서 유치원의 시원은 천주교에 의해 시작된 셈입니다.

1927년에 성 베네딕도 수도회는 서울에 있던 수도원을 원산의 덕원지역으로 모두 이전하고 1928년에는 덕원병원을 개설하였습니다. 의료활동 이외에도 목공소, 철제공장, 건축업, 농장 등을 운영하여 가난한 신자들을 구제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원산교구는 본당 12개, 공소 89개, 본당학교 12개, 성직자 35명, 수사 37명, 수녀 51명, 신자 1만 1천여 명이었다는 사실만 봐도 원산교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산교구에 이어 13년 뒤에 평양지역에도 평양교구가 설립되었습니다. 원산교구는 1883년에 첫 공소가 안변에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면 평양교구는 1896년에 평양성 밖에 있던 평천리(지금의 평천구역)에 평양성당이 설립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895년 가을에 황해도 수안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던 파리외방전교회의 르장드르신부가 평양 평천리에서 살고 있던 신자인 조신종의 집을 방문하여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고 이어 평양지역의 신자들이 돈을 모아 기와집을 사서 평양성당을 설립하였던 것입니다. 2년 후인 1898년 5월에는 평양시 관후리(중구 서문동)로 이전하였고 1934년 2월 평양시 선교구역에 대신리성당으로 분리되면서 관후리성당으로 개칭하였습니다.

평양성당이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1905년 9월에는 기명학교를 설립하였고 1906년 5월에는 성모여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진남포와 평북도의 의주, 피현 등지에 자성당들을 분리설립하면서 규모를 확대해 나갔습니다. 3대 주임이었던 김성학 신부가 재임하던 1927년 3월 17일에 평안도 지역이 서울대목구에서 분리되어 평양지목구로 설정되어 1931년 3월 서포(西浦)에 지목구 청사 및 성당이 건립되면서 이곳이 평양지목구의 행정 중심지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1939년 7월에는 평양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말인 1944년 2월에 성당과 부속 건물들이 징발되었다가 광복 이후인 1947년부터 북한당국으로부터 환수받아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1949년 5월과 6월, 12월에 홍용호 주교, 12대 주임 김필현 신부, 서운석 신부가 각각 북한당국에 피랍되면서 성당은 교인들이 없는 빈 공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구소련은 1945년 8월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북한지역으로 남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청진과 회령 본당에 있던 독일 선교사들과 수녀들은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당시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회령 본당 주임신부였던 비트마로 파렌코프 신부는 1945년 8월 21일에 체포되어 처형되었습니다. 함흥을 거쳐 평양으로 입성한 소련군은 평양주교관과 부속건물을 양도할 것을 명령하였고 서포에 있던 수녀원에 군용트럭을 몰고 와서 주야로 횡포를 일삼았습니다. 당시 평양교구장이었던 홍용호 주교가 소련주둔군 사령부에 찾아가 항의하였고 신자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소련당국은 1945년 10월에 사령관명령 제7호를 하달하였습니다. 명령 제3항에는 ‘각종 종교단체의 의식을 허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무신론과 유물론을 앞세워 천주교나 개신교를 반대하던 소련공산당이 북한을 점령하는 동안에라도 북한주민들이 적대감을 해소하고 종교단체들이 저들에게 협조하도록 하기 위한 포용정책의 일환에 불과하였습니다.

광복 당시에 북한에는 5만 5천여 명의 천주교 신자, 20만여 명의 개신교 신자, 40만여 명의 불교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북한당국은 처음에는 포용정책을 실시하면서도 공산체제수립에는 방해되는 세력으로 간주하고 사회생활에서 차별을 하였고 공직에서 배제하고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였습니다.

결국 6.25 남침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49년에는 북한지역에서 천주교인들의 종교활동은 북한당국의 반종교정책으로 통제되었던 것입니다. 다음시간에는 전후부터 현재까지 북한에서의 천주교활동에 대해 더 얘기하기로 하고 여기에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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