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보위사령부의 검열 (1)

김주원∙ 탈북자
2018-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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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전보위부에 세워진 김정일 동상을 찾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간부들.
국가안전보위부에 세워진 김정일 동상을 찾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간부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새해 2018년 북한에도 민주화의 새봄이 깃들길 간절히 소망하며 오늘은 김정일 시대 북한에서 있었던 공포정치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1966년 10월 노동당 제2차 당대표자회의와 당중앙위원회 제4기 14차 전원회의를 통하여 김일성은 갑산파를 숙청하고 세습 권력의 토대를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김정일을 내세웠습니다.

당시 동유럽사회주의 지원으로 북한은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어 냈습니다. 이러한 경제성장은 김일성의 독재를 미화하고 묵인하는 기회로 악용됐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초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로 북한의 경제도 쇠락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더욱이 1994년 김일성의 사망과 함께 시작된 ‘고난의 행군’으로 권력을 물려받은 김정일은 최악의 위기에 몰렸습니다. 체제 붕괴냐 권력 유지냐를 판가름하는 갈림길에서 김정일에겐 국가와 인민의 생명재산, 조국의 미래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수백만 인민들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어가고 있는 그때 김정일은 ‘금수산기념궁전’을 새로 단장하는데 수십억 달러를 탕진했습니다. 한쪽으로는 기울어져 가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에 보기 드문 인간 대학살을 전국의 곳곳에서 자행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던 김정일의 인간도살 만행을 세상은 공포정치라고 불렀습니다. 1990년대 김정일의 공포정치는 크게 세 갈래로 이루어졌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사망한 김일성 측근들의 숙청이었습니다.

이는 북한의 공식적인 문건들에서 ‘채문덕 사건’이라고 명명하고 있으나 간부들 속에서는 ‘심화조 사건’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심화조 사건’이 북한의 고위층들을 겨냥했다면 인민군 보위사령부 검열은 북한의 중간급 지방 간부들을 겨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정일이 1995년 4월 당시의 사회안전부, 지금의 인민보안성(경찰)에 내린 지시에 의한 민간인 대학살이었습니다. 당시 김정일은 사회안전부가 올린 보고서를 접하고 “이젠 온 나라에 총소리를 울릴 때가 됐다”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1995년 5월 초부터 북한 전역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공개처형이 시작됐습니다. 처형된 주민들은 대체로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해 동으로 된 전화선을 자르거나 협동농장의 소를 잡아먹은 사람들이었습니다. 1995년 9월 3일 양강도 혜산시 연봉2동 채석장에서 협동농장의 소 한 마리를 잡아먹었다는 죄로 검산 협동농장의 청년 세 명이 공개처형을 당했습니다. 당시 이들의 나이는 만 18세, 20세, 24세에 불과해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습니다.

소 한 마리를 잡아먹었다고 세 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을 때 북한의 지방 간부들은 사리사욕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중국에서 들여오는 식량을 빼돌려 돈벌이를 하다가 국제사회의 대북지원이 활발해지자 그 범위도 크게 확대됐습니다. 중간급 간부들의 부정부패로 가뜩이나 굶주린 북한 주민들의 삶이 더 악화되고 그로 인한 분노는 고스란히 김정일 정권을 향했습니다. 중간급 간부들의 부정부패를 그대로 두면 분노한 인민들에 의해 김정일의 권력이 붕괴될 우려도 높아졌습니다.

‘심화조 사건’으로 북한의 인민들이 공포에 떨던 그 시각 당시의 인민군 보위사령부, 현 북한의 인민군 보위부가 남포시를 검열했다는 소식이 전국을 강타했습니다. 남포시를 휩쓴 보위사령부의 다음 표적이 자강도라는 소문도 함께 번졌습니다. 당시 자강도당 책임비서였던 연형묵이 보위사령부의 검열소식을 듣고 김정일에게 자강도에 대한 검열을 자청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남포시 검열을 통해 보위사령부는 11명의 간부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고 수많은 간부들을 비공개로 처형했습니다.

보위사령부의 다음번 표적이 자강도라는 소식에 양강도의 간부들은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자강도를 검열할 동안이면 그동안 저지른 범죄의 흔적을 덮어버리기에 충분하다는 타산이었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보위사령부의 표적이 바뀌었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보위사령부가 자강도가 아닌 양강도를 검열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양강도 간부들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1999년 1월 보위사령부 선발대가 양강도에 발을 들이밀면서 간부들과 주민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습니다.

인민군 보위사령부는 국가보위성, 인민보안성과 함께 북한의 3대 정보기관, 사찰기관에 속합니다. 초기 인민군 보위국으로 출발했는데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이 보위사령부로 승격시켜 인민군 내부만이 아닌 민간도 함께 감시하도록 했습니다. ‘선군혁명’의 구호를 든 김정일 정권에서 인민군 보위사령부의 위세는 그 어떤 사법기관보다 막강했습니다. 인민군 보위사령부가 북한 간부들과 인민들 속에서 더욱 악명을 떨친 건 그 잔혹한 고문수법과 상상을 초월하는 처형방식 때문이었습니다.

인민군 보위사령부가 양강도에서 공개처형 한 간부들과 주민들은 모두 4차례에 걸쳐 19명이었습니다. 이외에 비공개로 처형된 간부들과 주민들은 몇 명이나 되는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 중엔 부관 참시된 인물들도 있었습니다. 양강도 혜산시 성후동에서 밀수를 전문으로 하던 31살의 김호철, 일명 호빼로 불리던 인물은 고문에 의해 혜산냉동창고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보위사령부는 사망한 김호철을 주민들이 가득 모인 혜산비행장에서 총살하는 놀음까지 벌렸습니다.

가장 많게는 1998년 5월 혜산비행장에서 11명의 간부들과 주민들을 집단 처형한 사건이 있었고 이에 앞서 혜산시 위연지구 ‘위연중학교’ 앞 공지에서 4명을 총살했는데 그중 한명은 아편을 팔아먹은 의사였고 나머지 3명은 아편중독자였습니다. 또 양강도 대오시천에서 ‘지주’로 불리던 김창국을 공개 처형했고 양강도 보천군에서는 아편을 복용한 혐의로 세 명의 주민들을 공개 처형했습니다. 처형자들의 가슴엔 하나같이 이름과 죄명을 먹으로 크게 새긴 종이팻말들을 걸고 있었습니다.

처형장 뒤편엔 인민들을 향해 기관총을 걸어 놓은 자동차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보통 북한의 공개 처형방식은 처형자들의 눈을 가리고 입에 재갈을 물린 다음 가슴과 다리, 몸에 각각 세 발씩 모두 9발의 총탄을 발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인민군 보위사령부의 검열대가 처형하는 방식은 9발의 총탄을 모두 사람의 머리에 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잔인하기 그지없는 처형방식은 “머리가 썩은 자들은 그 대갈통부터 날려버려야 한다”는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심화조 사건’의 배경에는 김정일의 통치방식을 마땅치 않게 여긴 김일성 측근들의 불만이 있었습니다. 반면 인민군 보위사령부를 동원해 지방의 간부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이면에는 김정일을 향하고 있는 북한 인민들의 분노가 배경이 됐습니다. 김정일의 잘못된 정치를 중간층 간부들의 잘못으로 덮어씌우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평양시는 호위사령부가 지키고 있어 인민들의 저항을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으나 지방은 호위사령부와 같이 인민들의 저항을 막을 만한 병력이 따로 없었습니다.

이러한 원인도 지방 인민들의 저항을 두려워 한 김정일에게 보위사령부를 개입시킨 계기로 되었습니다. 실제로 ‘고난의 행군’시기 북한은 무법천지였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은 인민들의 저항을 두려워하면서도 중요한 한 가지를 방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굶주린 북한의 인민들에겐 들고 일어날 여력도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인민군 보위사령부의 검열, 그 자세한 과정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기로 하며 지금까지 출연에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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