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북한당국이 ‘운동’이나 ‘전투’같은 어휘를 붙여서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고달프게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천리마운동’, ‘좋은일하기 운동’, ‘숨은 영웅들의 모범을 따라 배우는 운동’,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과 같은 운동이나 ‘70일전투’, ‘모내기전투’를 비롯한 각종 전투들은 북한주민들에게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준 ‘운동’들이었고 ‘전투’들이었습니다.
이런 운동이나 전투들은 기간을 정해서 진행되었으나 ‘3대혁명소조운동’은 1974년에 발족하여 현재까지 근 45년 동안이나 지속되어오고 있는 ‘운동’입니다. 3대혁명소조운동에서 ‘3대혁명’이라는 어휘를 이해하면 왜 이운동이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3대혁명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상혁명과 기술혁명, 문화혁명을 뜻합니다. 그러면 오늘 시간에는 3대혁명소조원들이 파견단위들에서 어떻게 사상혁명을 진행하였는지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70년 11월에 진행된 조선노동당 제5차대회에서 김일성은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으로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노선을 제시하면서 그때부터 북한에서는 3대혁명이 당정책의 최우선과제로 되었습니다. 당시 당대회보고문에 명시된 ‘사상, 기술, 문화혁명은 사회주의 완전한 승리를 위한 물질적, 사상적 요새를 점령하기 위한 기본과업’이라는 내용이 이것을 잘 반영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정권은 그때부터 공산주의는 3대혁명과 인민정권을 더한 것이라고 정의하였고 ‘3대혁명이야 말로 낡은 사회의 유물을 청산하고 새로운 공산주의적인 사상과 기술, 문화를 창조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1970년대에 ‘혁명 1세대’로 불리는 항일투사들과 ‘전쟁로병’들의 고령화로 인해 사회적 분위기가 침체되었고 ‘사회주의 산업화’는 공업과 농업, 도시와 농촌의 큰 격차를 가져왔으며 동구라파사회주의 국가들에서의 노선갈등으로 북한으로서는 독자적인 생존방식을 고민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고민 속에 김일성이 내놓은 3대혁명을 김정일은 자기의 후계세습과 북한주민들의 세뇌화를 촉진시키기 위해 3대혁명소조운동을 발기하였던 것입니다. 김정일은 3대혁명소조운동에 대해 ‘3대혁명수행에 대한 당의 혁명적 영도를 철저히 실현하여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을 최대한으로 다그치기 위한 운동’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여기서 당은 곧 자기 자신인 김정일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3대혁명소조운동은 김정일의 후계세습을 위한 사상적인 도구로 이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70년 9월에 당중앙위원회 문학예술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던 김정일은 점차 노동당 내에서 자기의 활동영역을 넓혀나갔습니다. 1972년 10월에는 당중앙위원회 위원, 1973년 9월에는 당중앙위원회 비서국 조직선전 담당비서, 1974년 2월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중앙당 정치위원으로 되었습니다. 이로써 김정일은 중앙당은 확고히 장악, 통제할 수 있었으나 지방당조직에 대한 철저한 감시통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결국 김정일은 지방당조직들도 손금 보듯이 완벽하게 장악, 통제하기 위해 3대혁명소조운동을 발기하고 전국각지에 소조원들을 파견하였습니다.
사상혁명은 근로자들에 대한 사상학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방당조직과 기관기업소의 당간부들과 행정간부들을 장악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중앙당 3대혁명소조사업부에서는 사상혁명의 기본을 ‘당중앙의 영도를 충성으로 받드는 사업’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당중앙은 곧 김정일이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주민들이 김정일이 중앙당 정치위원이 되었다는 것도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당중앙이라고 하면 김정일을 의미한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상혁명의 극치는 ‘당중앙을 목숨으로 사수하자’는 구호에서도 잘 보여준다고 봅니다.
3대혁명소조원들은 당중앙인 김정일을 정치사상적으로 수호하기 위한 전위투사로 지칭되었고 사상혁명의 된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상혁명은 사상학습과 함께 사상투쟁을 동반하였습니다. 파견단위에서 3대혁명소조원들은 당위원회의 선전선동사업을 요해하였고 사상학습에서 나타난 결함들을 소조사업부를 통해 중앙당에 보고하였습니다.
영화문헌학습과 강연회, 말씀침투사업 등 다양한 정치행사들에 참가하는 정형들이 장악되어 상부에 보고되었으며 결함이 있는 당간부들은 당책벌은 물론 해임, 철직되어 노동자로 강등되거나 혁명화에 처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에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대학생들이 현장에 내려와 당 사상사업 집행정형에 대해 요해하면 오히려 훈시나 하려 했던 나이 많은 노간부들도 점차 3대혁명소조원들에게 잘못 보이면 그에 따른 피해가 혹독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김정일이 내부적으로 3대혁명소조는 ‘현대판 암행어사’라는 말을 한 것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북한주민들속에서는 3대혁명소조는 곧 김정일의 특명을 받고 내려온 암행어사라는 인식이 들면서 현장에서 간부들이 저지르는 비행들을 소조사업부에 찾아와 고발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1987년에 강원도 김화군 수태협동농장에 3대혁명소조원으로 파견되니 이곳에 이미 5명의 소조원들이 있었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6명의 소조원들은 자기가 맡은 작업반들에 나가서 당정책집행정형을 요해하고 사상학습상태와 선전물 관리상태를 조사하였습니다. 작업반선전실 벽에 걸려진 선전구호들의 관리는 물론 공공장소의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 정성관리상태도 항시적으로 검열하였습니다. 작업반 소속의 유치원들도 검열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유치원 원아들을 세뇌시키기 위해 만든 교양실 내의 도록판의 정성관리정형도 자주 검열하여 상부에 보고되었습니다.
기록영화로 제작된 ‘영화문헌’들이 하달되면 3대혁명소조사업부에서는 각 단위들에서 진행된 영화문헌 침투정형과 참가정형을 보고 받았습니다. ‘영화문헌’이라고 하면 김일성과 김정일의 위대성과 업적을 과대포장하여 북한주민들을 세뇌시키기 위해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말합니다.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을 맞으며 진행되는 ‘충성의 노래모임’ 진행정형도 검열조사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했습니다. 충성의 노래모임은 노래와 시, 무용, 희극 등 다양한 예술공연작품을 통해 김정일에 대한 충성맹세를 다지는 행사로 보통 1~2달 정도 준비하군 하였습니다.
김정일은 3대혁명소조원들은 “자기를 대신해 눈이 되고 발이 되고 손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고 소조원들은 김정일의 눈과 손발처럼 파견단위의 움직임을 하나도 빠짐없이 소조부를 거쳐 상부에 보고함으로써 김정일의 영도가 중앙당은 물론 지방당과 전국까지 속속들이 미치게 하는데 일조하였던 것입니다. 3대혁명소조원들은 1호작품으로 불리는 리 소재지에 있는 대형주제화와 사적비, 혁명사상연구실 관리정형과 작업반선전실과 교양실들에 있는 세뇌교양용 도록판들을 정상적으로 관리하는지에 대한 요해는 정상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물론 강연회와 해설담화 등 사상교양사업정형도 조사하였습니다.
시기적으로 하달되는 당정책에 대한 집행정형도 단위별로 당정책집행대장을 만들어 놓고 수시로 조사하여 그 정형을 상급부서에 보고하여 김정일이 파악하도록 하였으며 심히 어긋나는 현상은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직보선을 통해 보고되었습니다. 김정일이 3대혁명소조사업을 직접 틀어쥐고 중앙당은 물론 지방당까지 자기의 지도영역을 확대하는 과정에 북한사회는 당중앙이라고 불려지던 김정일의 유일적인 영도가 점차 강화되었고 종파주의, 지방주의, 가족주의 등이 북한사회에서 완전히 제거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3대혁명소조운동의 사상혁명은 철두철미 김정일의 후계세습을 위한 사상투쟁으로 점철된 무자비한 공포통치가 확대되는 과정에 이바지한 것이었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제가 3대혁명소조기간에 직접 겪었던 사상혁명의 속내를 파헤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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