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김일성은 왜 양세봉의 유언까지 조작했나
2023.12.20
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도서이며 북한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6장 시련의해, 4절 ‘합작은 불가능한가’에서 김일성이 언급한 양세봉 총사령은 1928년 만주지방에서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이 결성한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당시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살고 있던 조선족들이 ‘최고의 독립영웅’으로 떠받들었던 인물입니다.
10대 어린 나이에 중국공산당을 따라다니면서 나중에는 중국공산당에 입당,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에서 복무하다가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토벌이 심해지자 소만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도망쳤던 김성주 즉 김일성. 그는 해방 전 5년동안은 소련군 극동사령부 소속의 88저격여단에서 소련군 군인으로 복무했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마치나 자신과 나란히 이 위대한 인물을 거론하지만 역사는 양세봉이 김성주를 철없는 폭력청년으로 치부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양세봉 총사령에 대해 자신의 아버지와 가까운 친구였다고 하지만 이 역시 거짓말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특히 양세봉의 유언을 완전히 조작해 김일성을 끼어 넣은 것은 날조된 선전선동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김일성의 회고록 속의 양세봉에 대한 기록의 날조된 내용들을 하나하나 짚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세기와 더불어’에는 찾아볼 수 없지만 독립운동가 서세명의 집은 조선혁명군 주요간부회의의 장소였습니다. 중국 요녕성 무순시 흥경현(興京縣)에 위치한 서세명의 집은 지금도 조선독립투사들이 중국공산당과 처음으로 합작을 이루었던 회의 장소로, 그 유적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일제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그해 12월 16일, 독립군 내 국민부 군대인 조선혁명군 간부들은 서세명의 집에서 대표자회의를 진행합니다. 그러나 비밀이 누설되어 일본군의 습격을 당하면서 주요 간부 모두 당시의 봉천이라고 불리던 심양 일본헌병대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 후 독립군들은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국민부’의 위원장으로 양기하를, ‘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으로 양세봉을 선출하였습니다. 총사령이 된 평안북도 철산군 출신인 양세봉 총사령은 이후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과의 연합작전을 펼쳤고 당시 중국의용군 총사령관인 이춘윤과 협동하여 조중연합군을 편성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런 양세봉 총사령의 업적을 자신이 한 것처럼 만들기 위해 ‘서세명 독립투사’나 독립투사 간부들이 다수 잡혀간 ‘흥경현 사변’을 언급하지 않으며 양세봉 총사령을 자신이 직접 찾아갔던 일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세기와 더불어’에서 양세봉 부대를 찾아갔을 때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고 적고 있지만 이것 역시 사실과 전혀 맞지 않은 부분이며 이후 부대를 떠나게 된 이유가 양세봉 총사령이 김일성이 주장하는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단결과 단합에 대해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이 역시 날조된 내용입니다.
김일성이 양세봉 총사령이 이끄는 독립군부대인 조선혁명군을 찾아 갔을 당시, 부대는 중국인 반일부대와 합동하여 남만지역에서 일본군을 제압하면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반면 김성주 즉 김일성과 차광수 등은 중국공산당을 따라다니면서 군자금을 모은다는 명목으로 중국 지주집과 만주의 조선인들의 집에 찾아가 재산을 강탈하다 일본군은 물론 중국인에게도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이들은 양세봉 부대에 입대하여 자신들의 목숨을 건지고자 했습니다.
양세봉 총사령이 김일성을 부대에 받지 않은 것은 그가 공산주의자를 극도로 경계했고 또 이 같은 김일성의 경력도 이유가 됐습니다.
김일성 패거리는 이 즈음, 조선혁명군이 제공한 20자루의 총을 가지고 달아났는데 그걸 찾으러 다니던 조선혁명군 3중대 1소대 소대장이었던 고동뢰를 비롯한 소대원 9명이 김일성의 밀고로 중국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자료들은 당시 중국 장춘에서 간행되던 한국어 신문, 만선일보에 보도됐는데 대표적인 것이 1940년 4월, 5회에 걸쳐 실린 김일성에 대한 기사입니다. 비적의 수괴 김일성의 성장기(匪首 金日成의 生長記)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어 실린 이 기사에는 김일성을 비적의 두목이라고 칭하면서 중학교 시절부터 적화돼 비적질을 하였다는 구체적인 내용들이 실려 있습니다.
‘세기와 더불어’ 7권 19장 2절 족제비 사냥꾼에서 김일성은 조선혁명군 3중대장 심용준과 각별한 친분이 있었고 자신을 도와준 내용들을 설명하는데, 중대장 심용준은 바로 김일성이 밀고해 사망케한 고동뢰 소대장의 직속 상관입니다. 회고록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김일성은 은인의 무기를 도둑질한 무뢰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일애국열사들인 독립군 부대 투사들의 무기를 강탈하고 희생시키던 김일성이 몇몇 일행과 함께 양세봉 총사령을 찾아갔던 내용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뿐아니라 북한의 혁명영화들과 혁명소설들에서도 다뤄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김일성이 양세봉 총사령을 찾아가 항일전에 동참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을 당시 김일성이 저지른 일에 격분한 조선혁명군 독립군 투사들은 김일성을 사형시키라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양세봉 총사령은 항복하는 자는 죽이는 법이 아니라면서 받아들였는데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간부를 시켜달라고 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일행을 데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렸습니다. 40세의 나이가 되던 1934년 양세봉 총사령은 일제 밀정의 흉계로 희생되었는데 당시 최후를 목격한 부대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조선독립을 완성하지 못하고 가는 나는 조선민족 앞에 죄를 짓고 죽습니다. 몸을 잘못 놀려 개죽음 당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민족의 죄인입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출간된 도서 ‘압록강변의 항일명장 양세봉’은 양 총사령의 유가족을 비롯한 숱한 증인들과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서술된 책인데 여기에는 ‘나는 살기 틀렸구나. 너희들은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청취자 여러분, 그러면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양세봉 총사령의 유언이 어떻게 날조되었는지 기억나십니까?
김일성은 양세봉 사령이 임종을 앞둔 시점에 반공에서 연공으로 방향전환을 했다며 죽으면서 부하들에게 ‘나는 죽어서 항일을 할 수 없지만 너희들은 살아서 김일성 사령을 찾아가라. 살길은 그길 밖에 없다’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양세봉 총사령은 죽는 순간까지 조선독립을 완성하지 못하고 눈을 감는 것을 원통하게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의 유언에 잠시도 등장한 바 없는 김일성의 이름을 북한 노동당과 김일성은 철면피하게 끼어 넣었습니다.
언제 한번 제대로 된 무장부대를 창설한 적이 없으면서 조선혁명군 총사령인 양세봉 사령을 찾아갔던 김일성이 자신이 항일무장부대를 창건했다면서 항일유격대요, 반일인민유격대요, 조선인민혁명군이요 하는 부대명칭을 시대에 따라 바꿨던 이유도 거짓을 창조하려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또 이런 이유로 항일혁명열사릉의 양세봉 총사령 비석에는 ‘조선혁명군’이라는 이름 없이 그저 ‘독립군 사령’으로만 적혀 있습니다.
앞서 설명했지만 조선혁명군은 이미 1920년대에 독립군 내 국민부 산하에 조직된 항일무장부대이고 독립애국투사 양세봉이 조선혁명군 총사령이었지만 김일성은 역사왜곡을 하다보니 18명의 청년들과 부대에 받아달라고 찾아갔던 것이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한 것으로 날조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역사왜곡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운 김씨왕조와 북한 노동당 선전선동부는 북한주민들이 외부세계를 아는 것이 두려워 인터넷을 차단하여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21세기에 지구상에 유일한 가장 폐쇄적인 북한. 그 근저에는 김씨왕조의 날조된 역사왜곡이 근원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