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년간 TV카메라와 함께한 최창준 선생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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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스앤젤레스 평통의 최고령자인 최창준 홍보분과위원장이 2014년 평통 신년하례식에서 박근혜 대통령 표창장을 받았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평통 위원들은 물론, 많은 한인사회에서는 최창준 씨가 행사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취재하는 모습에 감탄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젊은이들도 힘들어하는 TV 영상 취재를 쉼 없이 해내고 있다. 최창준 씨는 올해로 TV 카메라를 잡은 지 31년이 된다. 30여 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KBC 한국어 방송 프로그램을 시작해 오래전 LA로 이주해 방송활동 이외에 커뮤니티 활동에도 정열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최창준 씨는 월남전 당시 종군 기자로 짧은 기간동안 취재했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자유아시아방송과 회견에서 밝혔다.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31년째 TV 카메라와 함께해온 원로 방송인 최창준 선생을 만나본다.

한 취재 현장에서의 최창준 원로 방송인 (사진제공: KBC TV).
한 취재 현장에서의 최창준 원로 방송인 (사진제공: KBC TV). 사진제공: KBC TV

한국 전쟁 참전 유공자이신 최창준 선생의 6.25 전쟁 중 군에 입대한 이야기 들어본다.

최창준 선생: 저는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는데요. 개성이라는 데가 삼팔선 경계선에 있어서 6.25를 전 후해 항상 뭐 포탄이 날아오고 그랬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포탄이 날아오더니 아침에 일어나니까? 벌써 인민군이 개성 시내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인민군이 점령해 있다가 (그당시 저는 학생이었으니까요! 고등하교) 9.28수복으로 유엔군이 들어오고 난 다음에 개성을 되찾아서 그래 제가 그해 11월에 군에 가기 위해서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군에 입대했습니다. 1951년 2월 10일 육군 소위로 입관해서 전방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러다가 군에 있다가 육군 대위로 6년 근무하고 제대했습니다.

최창준 선생이 월남전 당시 유엔군 산하 종군 기자로 활약한 이야기다.

최창준 선생: 제대해서 관청에서 일하다가 그 당시 저는 사진 관련으로 일했습니다. 그래 한 2년인가 근무하다가 유엔군 산하 자유의 벗을 발행하데가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옮겨 근무하는 도중에 월남에 취재차 한 달 동안 갔었지요. 그 당시에는 뭐 취재니까? 어느 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전투지역을 돌면서 취재했습니다. 그래 자유의 벗 제작에 기여했지요.

최 선생은 당시 짧은 기간이었지만 종군기자 활동은 참으로 잊을 수 없다고 들려준다.

최창준 선생: 종군 기자로 한 달 동안 전 전투지역을 도는데 어느 지역은 가면 그날 밤에 죽을지도 모를 전시상황, 상당이 위험한 상황이지요. 그렇지만 취재하면서 보람을 느꼈고, 그래도 다행히 취재 때는 큰 전투는 없었지만, 항상 불안과 대비 태세가 겸해져 있었습니다.

최창준 선생이 1976년 미국에 오기 직전에 서울시에서 주관한 사진 경연에서 상을 받은 이야기다.

최창준 선생: 베트남도 종군 기자로 갔다 왔고 6년인가 근무하다가 나와서 미국으로 오게 됐는데 그 와중에 서울시에서 사진 콘테스트(경연)가 있었습니다. 제가 출품한 작품으로 4가지의 상을 받았습니다. 그래 사진에 조금 관심도 있고, 사진을 통해 보는 감각이 있어서 또 취재도 다녔기 때문에 상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최창준 선생은 1976년 미국에 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말 TV 방송을 하게 된다. 그것도 공중파 TV 방송을 했다고 한다.

최창준 선생: 제가 1976년도에 미국에 이민하게 됐습니다. 이민 첫 도착은 버지니아로 갔었는데요. 자녀는 2남 1녀를 뒀는데요. 다섯 식구 전원이 버지니아에 조금 있다가 샌프란 시스코로 이주했는데 센프란시스코에서 살면서 보니까? 방송에 항상 관심이 있으니까? 사진을 했으니까요. 거기서 방송들을 몇 개월 하다 그만두고 몇 개월 하다 그만두고 그래서 참 안타깝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방송을 하는데 관심을 갖고 시작했는데 그것이 83년도 샌프란시스코에서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 방송은 들어와 있지 못했고요. 그 당시 똑같이 KBS 가 KTE라고 해서 LA에 들어왔습니다. LA에서 일주일에 1시간 방송하는데 저는 공중파로 매일 1시간씩 방송했습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2시간 방송을 하고요. 미주 지역에서는 제일 많은 시간을 공중파 방송을 했었지요.

최창준 선생은 당시 어떤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했는지 들려준다.

최창준 선생: 그 당시에는 뉴스를 LA에서 속달로 받아다가 한국 뉴스를 방송했고요. 또 현지 프로그램이 많았습니다. 대담이라든가, 행사라든가, 그런 걸 취재해 방송했지만, 그 당시 연속극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냥 현지 프로그램 제작이니까요. 기자와 방송 요원이 여러 명 있어서 그래도 제대로 된 방송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본국 뉴스만 받아서 방영하고, 나머지는 현지 제작이었으니까? 그래 대담 방송도 많았고 현장 취재로 좀 보람을 느꼈었습니다.

최창준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방송 테이프를 송출하는 곳으로 갖다 주면서 있었던 일화도 들려준다.

최창준 선생: 그 당시 샌프란시스코 있으면서 방송 테이프를 송신소에 갔다 줘야 합니다. 방송 송출을 위해서요. 그런데 방송이 바로 나가야 하는데 시간에 맞춰서 편집해 방송 시간까지 갖다 줘야 송출돼서 방송이 되는데 샌프란시스코는 안개가 많이 낍니다. 송출하는 곳이 산 꼭대기에 있습니다. 근데 송출하는 곳이 산 꼭대기 인 데 안개가 끼어 보이지를 않습니다. 단 1미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집사람과 같이 너무 위험하니까요. 집사람과 차를 타고 가는데 1미터도 보이지 않는 산길을 올라가는데 어떻게 올라가는지도 모르게 일단 올라가서 전달했습니다. 그런 방송 하면서 사명감 참 그 신경이 많이 써지지요. 사명감으로 제가 일한 보람을 느꼈습니다. 방송하던 당시에요.

최창준 선생은 지금도 로스앤젤레스에서 인터넷 방송을 하고 있다. 직접 촬영 제작하는 과정 때문에 1983년부터 인터넷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최창준 선생: 3년쯤 샌프란시스코에서 방송하다가 부모님이 LA(로스앤젤레스) 계시기 때문에 LA에 내려가서도 인터넷 방송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1983년도부터 컴퓨터를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LA 내려와서는 인터넷 방송을 했는데 자랑한다면 저는 직접 비디오를 취재해와 혼자 편집해서 DVD만들어서 방송국으로 보내 줬습니다. 그러면 방송국에서 방송하는데 그래 저로서는 방송이라는 것은 83년도부터 현재까지 케이블 TV, 인터넷 방송 등 31년간 방송에 몸담고 있습니다.

최창준 선생은 자신의 취재활동 일면을 들려준다.

최창준 선생: 기계에 대해 상당이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월남전 취재 갔을 때도 사진을 워낙 많이 찍다 보니까? 앵글 잡는데도 좀 많은 지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왜냐면 보도 사진 같은 경우는 빨리빨리 장면을 잡아야 하거든요. 좋은 장면들을요. 그런데 많이 머리가 돌아가는 것 같아요. 제가 보드래 도요. 그래서 지금도 뭐 혼자 하면서 불편을 못 느끼고요.

최창준 선생은 바로 지난달에 월드 사진 경연에서 특별상을 받았다고 한다.

최창준 선생: 지난달에 월드 사진 콘테스트에서 상 받았어요. 특별상을요. 제목은 긴급 구조로 여기 엘에이(LA)에 그리피스 천문대가 있습니다. 거기서 산 꼭대기에 있는데 사람이 긴급상황이 생겨서 헬리콥터가 구조하는 장면 그거를 취재해서 사진전에 응모했었지요. 그래 제가 특별상을 받았어요.

최창준 선생은 좋은 장면을 보면 사진에 담아 혼자보다는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 주고 싶어 지금도 카메라를 가지고 다닌단다.

최창준 선생: 그거는 천직인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은요. 그런 기술면, 태생으로 봤을 때도 요. 사진 찍다 보면 매력, 또 액션, 그런 데서 상당히 관심도 많고 그런 걸 담고 싶어요. 담아서 저만 갖고 싶은 게 아니라 욕심이 남에게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항상 존재하고 있어요.

최창준 선생은 젊은이들에게 열정을 갖고 미래를 향해 전진하기를 바랐다.

최창준 선생: 군대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일을 맡으면 책임감을 갖습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일단 끝을 맺어놔야 편안해요. 그래서 표창도 많이 받았지만, 군에서 도요. 한 번은 군에서 단장이 일요일인데 순찰을 하는데 일요일도 일을 마치기 위해서 일요일도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을 단장이 보고서 격려해 줬는데 그만큼 일을 하나 맡으면 끝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을 가진 것 같아요. 저는 생활신조를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나이는 하나의 숫자에 불과하고 젊었을 적에나 나이 들었을 적에나 항상 젊었을 적 활기찬 그 성격을 갖고 모든 일에 전력을 쏟으면 늙지고 않고 건강도 항상 유지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항상 젊은 마음을 갖고, 열성을 갖고 매사에 집중하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최창준 선생은 어떤 바람을 갖고 계실까? 통일돼 고향에 가고 싶단다.

최창준 선생: 그런데 하나 바라건대 제가 이북에서 나왔으니까? 빨리 남북통일이 돼서 이산가족이 얼마나 많습니까? LA에서 이북도민총연합회 회장도 했지만, 그 이산가족들이 자기 고향을 가고 싶어서 얼마나 애타게 기다린 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이가 들기 전에 더 들기 전에 저세상으로 가기 전에 빨리 남북통일돼서 고향도 가보고 또 생존해 계시는 분들도 만날 기회가 됐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대합니다.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31년째 TV 카메라와 함께해온 원로 방송인 최창준 선생을 만나봤다.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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