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 농업전문학교 동창들에게 보내는 편지


2006.06.14

남한에 정착한 탈북 언론인 한민(가명)씨가 역시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을 만나 이들의 애환을 들어보는 ‘한민의 탈북자가 만나본 탈북자’ 순서입니다. 북한에서 농업전문학교에서 공부하다가 2000년에 탈북하여 남한에 온 노성훈(가명)씨가 당시 한 학교동창생인 김명빈, 최석칠, 고순남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명빈, 석칠, 순남아, 보고 싶은 친구들아!

잘 있는지, 뭐하며 살아가는지 긍금하구나. 명빈이와 순남인 군대에서 제대될 때도 되어 올 거고 석칠인 내가 떠날 때 목장에서 일하는 것을 보았는데 지금은 뭐하는지... 배고파서 더는 공부 못하겠다고 짜증부리면서도 우린 참 멋진 친구들이었어. 순남이가 아프다고 거짓말하고 가져온 강냉이 한 배낭으로 우린 두 달 동안 저녁마다 잔치상을 차렸었지. 두부, 가재미, 이밥, 돼지고기국... 일생에 그런 기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너희들은 그런 밥상이 진수성찬으로 상상하며 살겠지? 내가 여기서 밥 먹을 때마다 오히려 너희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든다. 여기서 너무 좋은 음식만 먹는 것 같아서 말이야.

명빈아, 우리 학급에서 그래도 제일 학점이 높았던 네가 3학년 때 영양실조로 눈이 잘 안 보인다고 병원에 갔을 때 엄격하던 교무부장 선생님도 창밖을 내다보며 아무 말도 없으시던 그 침묵 속에서 많은걸 알게 됐지. 강의를 한창 진행하시던 58세의 수의학선생님이 수업 도중에 맥없이 쓰러져 집으로 실려간 뒤 우린 그 선생님을 다시는 교단에서 볼 수 없었을 때 난 그 모든 것이 거대한 사기에 속아 헤어나기 어려운 길로 나라전체가 서서히 빠져가고 있음을 느꼈다. 마치 캄캄한 밤에 깊은 수렁을 향해 인민이라는 행렬이 줄을 지어 질서 있게 차곡차곡 들어가는 것 같이 보였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 저항 없이 말이야.

학교 기숙사에서 3년 동안 꼬박 강냉이밥이나 죽을 먹으며 그래도 졸업을 하겠다고 버티던 그때 정말 모두 정신들이 나갔었지... 1학년 때 대용식량이라면서 먹으라던 벼 뿌리가루와 강냉이대 분쇄한 가루로 죽을 끓여 먹어 봤지? 모두 그날 저녁 배 아파서 소란 피웠던 거 말이다. 벼 뿌리와 강냉이대, 칡뿌리를 말려 분쇄하여 감자와 강냉이 가루를 섞어 죽을 끓여 먹던 그때 우리학교만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모두 그랬다고 한다. 그런 걸 식량대용이라고 당의 방침으로 인민들에게 권장하는 나라는 세상에 북한 말고 없다.

난 석칠이가 어느 날 밤에 없어졌다가 새벽 3시에야 기숙사로 들어온 그때 모두 잠든 줄 알았는데 행여 어디 가서 먹을 거라도 구해 오는 줄 알고 모두 벌떡 일어나는걸 보고 웃던 일을 잊지 못하겠다. 나도 그 시절에 정말 배가 고파 밤에 잠아 오지 않았다. 강의시간엔 눈감고 먹고 싶은 음식을 상상해 보곤 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 그런 상태라고 하더라. 겨울엔 추워서 떨고 긴 겨울밤엔 배가 고파 잠이 안 오고 하여 과수밭 도적질도 많이 했었지.

참, 우리 학급에 제대군인 소대장 있었지? 2학년 때 임신한 자기 아내에게 풋강냉이를 먹이겠다고 농장 강냉이 밭에 들어가 강냉이를 따다가 경비 서던 군인들에게 맞아서 다리가 부러진 그가 생각나지? 참 인생이란 ... 그를 중국의 어느 농촌에서 봤다. 4살 된 딸을 업고 있더라. 어느 여름밤에 우리 넷이서 학교 뒤 저수지 뚝막에서 농장 과수밭에서 훔쳐온 배를 삶아먹으며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삶은 배요리”라고 하던 순남이 말이 생각나지? 그땐 우습기만 했는데 지금 추억하니 슬프다. 그곳에 아직도 너희들이 고생한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내가 1999년 가을에 졸업하고 집에 오니 부뚜막에 가마1개와 거미줄로 덮인 전등알 한 개, 그리고 낡은 장롱 한 개, 이불 2채가 우리 집의 재산 전부였다. 어머닌 몇 년째 앓아누우셨고 동생은 중국으로 건너가 1년째 소식이 없었지.

그해 겨울에 몸무게 27킬로그램이 된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눈물 속에 어머니를 묻고 나는 묘지에서 내려오는 그길로 두만강을 넘었다. 여러 고생 끝에 2001년에 남한에 와서 지금은 자동차 정비업소에서 열심히 일하며 산다. 일한 것만큼 돈도 벌고 기술도 배운다.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전국 명소를 ?아 다니며 여행도 하고 맛있는 요리를 골라 먹는다. 자랑하자니 너희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든다.

여기 남한에서는 모든 것이 다 좋은데 한 가지 슬픈 것이 있다면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 못한다는 것이다. 굶는다는 것,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죽었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모르기도 하고 알려고도 안 해. 북한에 비해 남한은 아득히 멀리 발전했다.

명빈아, 석칠아, 순남아, 희망을 가지고 억세게 살길 바란다. 우리가 19살에 헤어졌는데 만날 땐 80대의 할아버지가 될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만날 날이 온다는 건 알고 있다. 앞으로 세상 좋아지면 너희들은 북측에서 난 남측에서 친구상봉 신청해서 금강산에서 만나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정말 너희들과 함께 놀던 고향의 산이며 바위며, 나무며 모두가 그립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안고 오늘도 난 고향을 그린다. 그리고 마음을 굳힌다. 더 열심히 살자고 말이다. 고향에선 나를 두고 당과수령을 배반한 조국반역자라고 한다지만 난 그들이 불쌍하기 만하다. 몰라서 그러고 있지. 알면 절대 그렇게는 안 산다.

친구들아, 자유는 참으로 소중하고 대가를 치러야 얻어진다. 자기 인생은 스스로 알아서 사는 거다. 다시 만날 그날을 위해 모두 건강하고 잘 있어라. 2006년 5월 26일 남한에서 친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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