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 중앙당 연락소 간부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2006.06.21

남한에 정착한 탈북 언론인 한민(가명)씨가 역시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을 만나 이들의 애환을 들어보는 ‘한민의 탈북자가 만나본 탈북자’ 순서. 오늘은 2001년에 탈북하여 남한에 온 백경호(가명)씨가 북한 중앙당 연락소 간부로 있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친구, 잘 있었나? 나 자네와 몇년전에 광복거리 어느 집에서 전기시타에 고구마 구워먹으며 밤이 새도록 진지한 세상이야기 하던 친구다. 누군지 알겠지? 지금 이 편지를 서울에서 쓴다. 인생길을 걷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 난 지금 북한에서 폼 잡으며 살던 버릇 깨끗이 버리고 서울에 적응하느라고 착한 사람연습하고 있다. 몇 년 습관붙이면 괜찮을 것 같아 보여.

너 와 난 16살 때부터 줄곧 우정을 키워왔는데 이젠 우리도 영화에서처럼 남과 북으로 갈라졌구나. 너에게 편지로나마 전해주고 싶은 사연이 있다. “꺽다리“ 생각나지? 우린 세 친구였지. 그가 중국에서 내게 보내온 체험수기 중에 몇 토막을 그대로 보낸다.

우리 집에는 75세 되신 할머니가 계서도 중풍으로 인해 아무것도 분간을 못하시므로 우리는 항상 출입문 밖으로 자물쇠를 잠그고 다녔다. 더 이상 우리 집에서도 하루 죽 두 끼로 살아가게 되자 옆 동네 사시는 큰 삼촌은 앓아누운 할머니를 자기 집으로 모셔가겠다고 하신다. 이제는 지겨운 할머님의 시중드는 일도 끝날 것이고 대, 소변 못 가리시는 할머니의 역겨운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큰 삼촌이 할머니를 자기 집으로 모셔 가면 청진에 사시는 큰 아버지가 큰삼촌에게 강냉이(옥수수)를 20킬로그램을 보내주겠다고 해서 할머니를 모셔간 것이란다. 할머니를 모셔간 후에도 큰삼촌은 그냥 우리 집에 발길을 끊이지 않으셨다.

청진 큰아버지가 보내준 강냉이 20킬로그램이 할머님까지 해서 다섯 식구가 며칠을 더 견딜 수 있겠는가! 하여 삼촌은 우리 집으로 발길을 계속 하시는 것이다. 가지고 갈 것은 없으나 그래도 오시면 죽이라도 한 사발 드시고 가면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중학교에 다니는 내 남동생 경수가 학교를 마치고 왔는데 집에 오니 경수 죽이 없는 것이다. 공부시간 내내 배고픔을 참으며 집에 있는 자기의 점심 몫을 상상하며 왔겠는데 없는 것이다. 경수는 엉엉 울면서 자기의 죽이 없다고 난리였다. 큰삼촌이 어디 갔다 오시면서 하시는 말이 “좀 전에 내가 배고파서 한 그릇 먹었구나” 하시는 것이다. 아침에 어머님은 죽을 식구수 만큼 사발에 담아서 가마에 넣어놓곤 하셨다. 그러면 점심에 먼저 오는 사람이 한 사발씩 꺼내 먹었는데 그날은 우리집 급식인원이 아닌 삼촌이 한 사발을 잡수신 것이다. 다행히 나와 경익이는 먼저 와서 점심을 먹었고 맨 늦게 집으로 온 경수의 점심이 잠간 들린 배고픈 큰삼촌이 잡숫게 되었던 것이다. 철없는 경수는 큰삼촌이 밉다고 울고 큰삼촌은 당황해하던 모습을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참, 세상도 더럽다! 혈육간에 죽 한 그릇 놓고 이렇게 비참해 질수가 있을까! 피를 나눈 혈육간에도 서로를 저주하게 만드는 나라가 또 어디 있을까! 얼마나 굶으셨는지 큰삼촌은 이성을 잃으셨다. 사람이 먹지를 못하니 바보가 되는 것이다. 4급기업소 당 비서로 전국 조선로동당 세포비서 대회에 참석했던 큰삼촌이 식량난에 굶주려 바보가 된 것이다. 전체인민이 그 누구라 할 것 없이 바보가 되고 이성을 잃고 먹는 것에 집착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큰삼촌 집에 가셔서 3개월 만에 굶어서 돌아가셨다. 돌아가실 때 할머님 모습은 뼈에 가죽 뿐이셨다. 너무나도 처참하고 보기가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같이 계실 땐 밉고 싫었지만 돌아가실 때 모습을 보니 슬펐다.

우리 집에 계셨더라면 죽이라도 드시고 아마도 더 오래 버텼을 지도 모른다. 우리 할머님뿐이 아니다. 1990년대 중반에 어느 곳이라 할 것 없이 자고 일어나면 어느 집 누구가 굶어죽었다는 소문이 수두룩했다. 어려운 식량난으로 인해 제일 먼저 굶어 죽는 사람들은 제일 노인들과 아이들이었다. 심지어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역전과 장마당 주변에는 방황하는 어린애들과 여성들이 얼굴에 때를 잔뜩 묻히고 먹을 걸 좀 달라고 구걸하는 모습이 흔하게 보였다. 이 나라는 기울어지기 시작했다고 오래 산 노인네들이 수군거렸다.

어느 도시의 한복판에 대형 그림판이 있는데 그림은 건장한 조선청년이 말라빠진 미군과 일본군 그리고 남조선군대를 한 주먹으로 때려잡는 내용이고 대문자로 “미제침략자들에게 천백배의 죽음을 주자!”라고 씌어져 있다. 그 구호 바로 밑에는 굶어죽은 어린애의 시체가 행인들의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며 식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에 너무 오래 습관 되어 가는 것이다.

이것은 그 친구가 탈북한 후에 쓴 체험수기다. 지난날 나도 그랬었지만 너도 인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똑바로 알아야 돼. 그걸 모르면 자기 자신도 영원히 모르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착하고, 너도 잘 아는 그 친구에게 그런 아픔이 있었다는 걸 알고 나 스스로 슬펐다. 그런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북한에 어디 한둘이겠나! 너의 건강과 가족의 행복을 바라며. 2006년 5월 23일. 서울에서 친구 백. 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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