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를 돕기 위해 취재를 바탕으로 가상의 인물을 설정한 사례입니다.
북한 평안남도의 한 국영 식료 공장에 다니는 40대 노동자 김 씨는 월급에서 사전 공제를 빼고 북한 돈 2만 원을 손에 쥔다. 아내와 두 자녀 등 4인 가족이 옥수수로만 끼니를 때워도 한 달에 최소 165만 원이 든다. 아내가 한 달에 보름씩 일당 10만 원짜리 ‘일공’을 나가도 매달 적자를 메울 수가 없다. 북한 내부 소식통이 전한 10월 물가를 바탕으로 RFA가 작성한 가상의 김 씨네 가계부는 대다수 북한 가정과 다르지 않다.
북한 국영기업 노동자의 공식 월급(노임)은 3만~5만 원 수준인데, 입쌀은 1kg에 4만 원, 옥수수는 2만 5천 원 선에 거래되고 있다. 이미 지방 도시에서는 입쌀 1kg이 5만 원을 넘었다. 이처럼 월급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식량 가격이 폭등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먹을거리가 부족해서 값이 오른 것은 아니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 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24년 가을부터 2025년 가을까지 1년 동안 북한의 식량 생산량은 전년도보다 0.1% 늘어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같은 기간 쌀값은 73.6%, 외화에 대한 환율은 74.4%나 올랐다.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북한 돈의 가치가 하락한 것이 가격을 끌어올렸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2023년 국정 월급이 최소 10배 이상 올랐을 때만 해도 북한 주민의 기대감은 컸다. 하지만 불과 3년도 안 돼 월급으로는 쌀 1kg도 사 먹지 못할 만큼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일반 주민의 가계부에 직격탄을 던졌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북한 당국의 무분별한 통화 발행 가격 정책’, ‘해외에서 유입된 외화가 순환하지 않는 구조’, ‘식량·외화에 대한 국가 통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풀이했다.

원인 1: 월급 20배 올리며 ‘돈표’ 찍자, 물가도 따라 뛰었다
2023년 말, 북한 국영기업 노동자들의 월급이 한꺼번에 크게 올랐다. 일본 언론매체 ‘아시아프레스’ 오사카 사무소의 이시마루 지로 대표에 따르면 주민들이 처음에는 이를 반겼다. 하지만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이어지면서 월급 인상은 금세 의미를 잃었다.
김 씨의 공식 월급 5만 원도 이때 오른 금액이다. 그런데 각종 명목의 지원금을 뗀 후 실제 손에 쥐는 2만 원으로는 옥수수 1kg도 살 수 없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INSS)의 임수호 선임 연구위원은 올해 4월 북한의 환율·물가 폭등의 원인을 분석한 보고서에서, 인플레이션의 핵심 원인으로 대규모 통화 증발, 즉 시중에 돈이 많이 늘어난 것을 지목했다. 시중에 풀린 돈이 많아지면 화폐 가치는 떨어지고 물가는 오르게 되는데, 월급을 올려준 정책이 오히려 물가를 밀어 올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에서 배급은 무상 지급이 아니라 국가가 정한 낮은 가격에 곡물을 파는 방식이다. RFA 소식통에 따르면 쌀 배급 가격은 2023년 9월까지 1kg에 46원이었다. 비슷한 시기인 2024년 1월 시중 쌀값은 1kg에 5천700원 안팎으로, 배급 가격의 120배가 넘었다.
한국 통일연구원의 최지영 연구위원은 지난달 22일 조지워싱턴대 한국학연구소(GWIKS)와 KDI 국제정책대학원이 공동 주최한 북한경제포럼에서 북한 당국이 식량과 소비재 유통을 다시 독점하는 과정에서 이 격차를 줄이고자 배급 가격과 임금을 함께 조정했다고 설명했다.
[최지영] 2024년 초에 국가의 배급 가격을 기존 40원대에서 2천 원대로 인상하는 조치가 이뤄졌습니다. 배급 가격을 인상했기 때문에 실질 소득을 어느 정도 유지시켜 줘야 될 필요성이 있었고, 따라서 20배 정도 국정 임금을 인상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했다. 최 연구위원은 북한 당국이 인상된 임금을 지급하기 위해 화폐를 더 찍어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 수단으로 발행한 것이 ‘중앙은행 돈표’인데, 북한은 2021년과 2022년 정식 지폐 대신 임시 화폐인 돈표를 5천 원권과 5만 원권으로 발행한 바 있다.
임 연구위원도 지난달 29일 발표한 ‘북한 경제는 과연 호황일까?’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북한 당국이 2023~2024년에 임금을 올린 뒤, 인상된 임금과 대규모 살림집 건설, ‘지방 발전 20×10 정책’의 공사비를 대기 위해 중앙은행을 통해 막대한 원화와 돈표를 찍어냈다고 분석했다. 국가는 새로 찍은 돈으로 국책사업을 벌였지만, 그만큼 주민들이 손에 쥔 돈은 값어치를 잃었다. 임 연구위원은 이를 두고 세금을 걷지 않고 주민들에게 비용을 떠넘긴 ‘인플레이션 조세’라고 표현했다.
원인 2: 외화 들어와도 시장에 풀리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러시아에 병력과 무기를 지원한 대가로 외화 수입이 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반적으로 외화가 유입되면 자국의 화폐 가치가 오르고, 물가는 안정된다. 그런데 북한의 환율과 물가는 오히려 계속 오르고 있다.
미 스팀슨센터의 레이첼 민영 리 선임연구원은 북한경제포럼에서 북한이 러시아에 무기를 팔아 번 돈이 김정은 정권에는 도움이 되지만, 일반 주민의 살림살이까지 나아지게 한 것은 아니라고 꼬집었다.
리 선임연구원은 북한에서 무기를 만드는 군수 부문은 ‘제2경제위원회’라는 별도 기관이 맡기 때문에, 오히려 군수 부문의 생산이 늘어날수록 전력이나 원자재 등 부족한 자원을 가져감으로써, 주민들이 쓸 몫이 줄어들 수 있다는 점도 짚었다.
이시마루 대표 역시 전쟁 특수로 김정은 정권이 이득은 봤겠지만, 그 효과가 주민들에까지 미쳤는지는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시마루 지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참가의 대가로 현금이 북한에 보다 많이 들어갔을 수도 있고, 그다음에 기름, 식량, 그리고 발전기나 모터 발동기, 차량 등이 들어와서 김정은 정권 입장에서 보면 대가를 많이 받아 하나의 전쟁 특수가 생겼을 거예요. 그것이 일반 주민들에게도 파급 효과가 있었는가란 것은 따로 조사를 해야 됩니다.
최지영 연구위원도 북한 노동당과 군, 정부 기관이 벌어들이는 공식 부문의 외화와, 주민들이 시장에서 거래하는 비공식 부문의 외화가 분리돼 있다며, 시장의 외화 사정은 오히려 나빠졌다고 진단했다.
[최지영] 2023년부터 북러 협력이 강화돼서 외화 수입이 증가했음에도 이 외화 수입이 시장 영역, 비공식 부문으로 흡수되지 않는 것 같고, 이것이 시장의 물가와 환율을 지속적으로 상승시키는 원인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강력한 외화 단속도 환율을 끌어올린 것으로 파악된다. 북한 당국은 2023년 2월 노동당 전원회의를 전후로 외화 유통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는데, 같은 해 8월부터 개인의 외화 보유와 거래 단속이 훨씬 심해졌다는 탈북민 증언도 나왔다. 이에 대해 최 연구위원은 무역이 늘면서 외화 수요는 많아졌는데, 외화 거래에 대한 단속의 위험까지 커지자, 시장 환율이 올랐다고 분석했다.
원인 3: ‘식량 거래’ 금지 등 시장 단속 강화로 현금 수입 급감
설상가상으로 주민들의 소득원은 계속 줄었다.
북한은 2020년부터 2022년 사이 양곡판매소를 전국으로 넓힌 뒤, 시장에서의 곡물 거래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이시마루 대표에 따르면, 2023년 이후 장마당에서 쌀과 옥수수 판매를 금지하고, 식량은 국영 양곡판매소에서만, 생필품은 국영상점 중심으로 유통·판매하도록 했다.
임 연구위원은 앞서 2023년 보고서에서 김정은 정권이 식량 유통 방식을 이전의 ‘배급’과 ‘시장 거래’ 체제에서, 국가가 곡물 판매를 독점하는 ‘양곡전매제’로 바꿨다고 분석한 바 있다. 당시 그는 북한의 1인당 식량 공급량이 ‘고난의 행군’ 시기보다 낮은 역대 최저 수준이라며, 가격 안정이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곡물 거래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자 시장에 나오는 식량 자체가 줄었고, 이것이 쌀값 상승의 원인 중 하나로 꼽혔다. 임 연구위원은 특히 쌀은 옥수수보다 되팔기 쉬워 사재기 대상이 되면서 가격이 더 크게 올랐다고 분석했다.
또 시장에 대한 단속과 통제는 주민들의 돈벌이도 막았다. 이시마루 대표에 따르면 장마당 장사가 비교적 자유로웠던 시기에는 한 달에 200~300달러를 버는 주민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장사 수단이 막히면서 시장을 떠난 주민이 많고, 이들이 임가공과 같은 부업에 매달리거나 불법적인 일에 손을 대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고 그는 전했다.
“공짜는 없다”… 물가 상승 이어질 듯
그동안 국가가 무상으로 제공하던 서비스도 유료로 바뀌고 있다.
RFA는 지난 4월 북한 당국이 무상치료제를 없애고, 매달 보험료를 내는 ‘보건보험기금제도’를 도입하려 한다는 소식이 주민들 사이에 확산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당시 복수의 내부 소식통들은 2025년부터 진찰과 엑스레이 등 일부 의료 서비스가 유료로 바뀌었고, 주택과 전기·수도 사용료도 돈을 내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고 전했다. 김 씨네 가계부에 전기·수도 요금 5천 원이 고정 지출로 들어가는 이유다.
[이시마루 지로] 지금 북한 시스템은 하나의 구호처럼 이야기하는 게 ‘공짜는 없다, 사용료 내야 된다’. 그러니까 무상 치료제도 없어졌지 않습니까? 지금 병원에 가서 진단받는 것도 돈 내야 돼요.
이런 변화는 헌법에도 반영됐다. 북한은 올해 3월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을 개정하면서 ‘무상 치료’와 ‘세금이 없어진 나라’ 등의 문구를 삭제했다. 국가가 제공하는 공공 서비스에 앞으로 요금이나 세금을 매기겠다는 신호란 분석이 나온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앞으로도 북한의 인플레이션이 안정될 조짐을 보이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임 연구위원은 물가 폭등의 핵심 원인이 당국의 과도한 화폐 발행인 만큼, 급진적인 정책 전환이 없는 한 고물가가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또 시장 통제를 강화할수록 오히려 물가와 환율 상승을 부채질할 수 있다며, 특히 임금 인상 혜택을 받지 못하는 주민들의 식량난도 악화할 수 있다고 그는 경고했다.
최 연구위원도 올해 초 9차 당대회 이후에도, 국가가 지난 5년간 경제를 강력히 통제했던 정책 기조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며, 단기간에 시장 물가와 환율이 내려갈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RFA 내부 소식통은 가을 수확으로 일시 안정세를 보였던 곡물 가격이, 추수가 완전히 마무리되는 12월부터 다시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올겨울 김장과 석탄까지 장만해야 하는 11월, 월동 준비도 하기 전인 김 씨네 가계부의 적자는 이미 100만 원을 훌쩍 넘어선 상태다.
에디터 노정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