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8월 동해상에서 오징어잡이를 하다가 납북된 천왕호 선원 고명섭씨가 30년 만에 강원도 주문진 고향집으로 돌아와 꿈에 그리던 노모와 12일 상봉했습니다.

올해 84세의 고명섭씨의 어머니 김영기 할머니는 30년 가까이 아들이 죽은 줄만 알고 살아오다가 이날 극적인 상봉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30년 만에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기쁨만은 아니었습니다.
32살의 나이로 집을 떠났던 고명섭씨는 환갑을 넘긴 노인이 되어 어머니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을 맞는 어머니의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뻐야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주름투성이 되어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은 잃어버린 지난 30년을 되돌려 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분통이 터진다고 말합니다.
아들을 만나기 전날 밤 김영기 할머니는 30년 전 아들을 잃어버린 그날을 어제 일과 같이 생생히 기억합니다.
김영기 할머니: 그 애가 가기로는 음력으로 7월 초3일 날 나갔다. 날짜도 내가 안 잊는다.
지난 1971년부터 73년까지 월남전에 참전했던 고명섭씨는 제대한 이후 서울에서 건설업을 하던 친척을 돕다가 75년 5월 고향으로 내려와 일자리를 찾던 중 친구의 권유로 오징어 배를 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고명섭: 배운 것이 없으니 노동하고 살았다. 노동벌이도 마땅치 않아서 친구가 오양벌이 한번 나가자고 해서 장난삼아 한번 나갔다가 14일 만에 돌아왔다. 또 한 번 나가서 여비나 벌어 어디로 가려고 나간 것이 이렇게 된 것이다.
고명섭씨가 탄 오징어잡이 배 ‘천왕호’가 돌아오지 않자 동내사람들은 배가 침몰한 줄만 알았다고 합니다.
침몰인 된 줄 알았다. 낡은 배였지만 여기서 수리를 했다. 그렇지만 워낙 낡아서 침몰을 했다고 만 인정을 했다. 국가에서도 그렇게만 인정하고 찾지도 않았다.
7남매를 가졌던 김영기 할머니는 이미 절반 이상의 자식들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또 한명의 자식을 보내야 하는 가슴 아픔을 겪게 된 것입니다.
김 할머니: 7남매가 있었는데 딸 둘을 보내고 또 5형제이던 것을 둘을 보내고 이것 까지 셋이 없어진 것 이였다. 단 둘의 자식과 같이 있었다. 이번에 들어오면 셋이 되는 것이다. 얘가 둘째 애다. 큰 애도 세상을 떠나고 고부가 같이 살고 있다.
고명섭씨가 실종 된지 4년 후, 고씨의 아버지는 운명하는 순간까지도 고명섭씨의 이름을 부르며 가슴 아파 했다고 합니다.
김 할머니: 아버지도 돌아가실 적에 저게 없어진 것을 보고 돌아가셨다. 죽으면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침몰이 되어 죽었으니 애쓰지 말고 가라 가면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고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누누이 고씨가 바다에 나가지 말 것을 충고했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하더라도 육지에서 안전하게 일하기를 부모들은 희망했지만 한 푼 이라도 더 벌어보자는 욕심에서 고명섭씨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김 할머니: 굶어죽어도 배를 타지 않는 것이 낫다. 일절 배타지 말라고 항상 부탁했다. 바다에 가서 10만원 버느니 육지에서 5만원 벌어서 사는 것이 낫지 퍼런 바다에 나가지 말라고.. 늘 부탁을 했다. 우리는 죽은 줄만 알고 사망신고 까지 다했다.
고씨의 어머니는 자식을 잃은 아픔을 가슴에 품고 20여년의 세월을 살아온 것입니다.
김 할머니: 저 바다만 내다보면 저 물에서 굴러다니며 고기밥이 되나 항상 그 맘이 들었다.
고명섭씨가 죽은 줄만 알고 살아왔던 고씨의 가족들은 지난 1997년 뜻밖의 편지 한 장을 받게 됩니다. 고씨가 죽지 않고 북한 평안북도 성천에 살아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은 것입니다.
고씨 가족: 중국 드나드는 사람이 여기서 사는 내용을 얘기하니 자기 사촌이 이 동네에 산다고 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을 통해 자기가 죽지 않고 여기서 산다는 소식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부천 사는 딸이 나가서 사진을 보니까 오빠가 맞았다. 그때서야 살은 줄 알았다.
이렇게 아들로부터 편지를 받은 김영기 할머니는 그때까지도 아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김 할머니: 다 괜한 소리인줄 알았다. 30여 명 중 한사람도 나온 사람이 없으니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김영기 할머니는 자식이 살아있다는 소식에 안도 하기는 했지만 살아있어도 만날 수 없다는 현실에 점점 그리움만 더해 갔다고 합니다.
고명섭씨의 가족은 고씨를 만나려는 희망으로 지난 2001년과 2003년에 이산가족 신청까지 했지만, 북쪽으로부터 ‘확인 불가’라는 통보를 받고 한 가닥의 희망마저도 잃고 말았습니다.
고씨 가족: 통일부를 통해 신청해 보라고 했다. 나이가 많은 이들은 될 것이라고 했지만 깜깜 무소식 이였다. 생각해 보니 감춰 놓은 사람들을 돌려줄 리가 없었다.
김영기 할머니와 고명섭씨 가족들은 고씨의 송환을 위해 통일부 등 관련당국에 여러차례 도움을 요청했지만 큰 도움을 얻지 못했다면 정부에 대한 실망을 표했습니다.
고씨 가족: 무식자래도 정부가 너무 무심하게 했다는 게 너무 분해 죽겠다.
결국 고씨의 가족들은 무작정 정부가 도와줄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납북자 가족 모임의 최성용 대표에게 도움을 청하게 됐다고 합니다. 결국 고씨는 최성용 대표의 도움으로 북한에서 빠져 나오는데 성공했습니다.
고명섭씨는 최성용 대표의 협조자로부터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신의주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 왔다고 합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고명섭씨는 남한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남한으로 갈 경우 북한에 두고 온 아내와 두 남매가 고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명섭씨는 남쪽에 있는 가족들의 간곡한 설득과 재회를 손꼽아 기다리는 노모의 마음에 남한 행을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고명섭: 뱃사람으로서 그렇게 벌어먹었다면 들 분하겠는데, 장난삼아 나갔다가 그게 무슨 꼴이냐고. 사는 순간까지 자유롭게 살다가 죽는다 해도 오라고, 아무 생각 말고 오라고, 거기에 무슨 미련이 있냐고. 그 말만 했다.
이제 날이 밝으면 김영기 할머니는 꿈에도 그리던 아들 고명섭씨를 품에 안게 됩니다. 그렇지만 김영기 할머니의 마음은 밝지 만은 않습니다.
두 모자간의 상봉의 기쁨은 잠시겠지만 앞으로 가족을 뒤로 하고 온 고명섭씨의 슬픔이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고명섭: 단지 무거운 것은 식구를 두고 온 지 마음에 편하겠는가.. 밥 한술을 먹어도 편하겠는가. 그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니 와도 고생 가도 고생이니... 내가 낳기를 잘못 났나.. 복이 없이 낳아서 저런가... 저도 그렇게 말하더라.. 나는 인생이 왜 이 모양인가...
김영기 할머니는 또 자식이 앞으로 어떻게 고통을 딪고 살아갈지도 큰 걱정입니다.
김 할머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소. 사는데 까지 사는 것이지.. 그곳에서 사는 것 보다는 그럭 저럭... 목숨이야 뭐 가겠소 살기야 살겠지만 지 마음이 편하지 못하게 살려면... 말도 나올 것 같지 않고 불상한 생각이 들어 눈물만 날 지경이다.
이규상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