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 삶의 이모저모를 알아보는 ‘남한의 보금자리’ 시간입니다. 오늘은 그 여섯 번째 순서로 북한에서 김일성 주체사상탑 구조 설계에 참여했던 탈북여성 장인숙씨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97년 8월 탈북한 장 씨는 현재 남한에서 탈북인단체인 ‘평화통일 탈북인연합회의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담당에 이진서 기자입니다.
올해 63세인 장인숙씨는 1941년 생으로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습니다. 장 씨는 평양운수대학 교량터널과를 졸업했으며 평양 도시설계 사업소 2급 설계원으로 일하면서 96년 만 55세로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26년간 북한에서 토목기술자로 일했습니다.
장인숙: 평양시 주요 토목 구조물 설계에 참여 했는데 주로 다리를 설계했습니다. 김일성 생일 70회때 평양 주체사상탑을 건립했는데 그때 참여를 했습니다. 그때 김정일 표창도 받았고, 국가 훈장도 10개 수여 받았습니다. 그리고 당 세포 비서로서 당과 수령을 위해서 목숨 다 받치고, 정말 열렬하게 싸운 한 사람이 이었습니다.
큰 어려움을 모르고 북한에서 편안한 삶을 살고 있던 장 씨의 가족은 외국 유학 중이던 큰아들 정현 씨가 남한으로 넘어 가면서 하루아침에 반동가족으로 낙인찍혔습니다. 그 후 평양에서 함경북도 온성의 탄광으로 추방을 당하면서 장 씨의 가족은 또 다른 삶을 살게 됐습니다.
장인숙: 소련으로 유학 갔던 아들이 동부 공산권 나라들이 붕괴되자 북한으로 온 것이 아니라 한국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일가족이 함경북도 온성 탄광 - 아오지 탄광 옆이에요 - 거기 추방돼서 약 7년간 고생을 하다가 먼저 온 아들하고 연계가 되어서 한국에 왔습니다.
가족이 모두 오자고 했는데 둘째 아들이 잡혀서 지금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들어갔는데, 생사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두 아들 데리고 대한민국에 97년 9월에 와서 약 7년 동안 정착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온성 탄광으로 장 씨의 가족이 추방당하기 전까지 장 씨의 큰 아들 정현 씨는 러시아에서, 둘째 아들 정광 씨는 동독에서 유학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셋째 정용 씨는 비행군관 학교에 입학을 했고, 막내 정남씨도 만경대 혁명학원으로 갈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몸으로 4형제를 키우던 장인숙씨가 남한 행을 결정하기 까지는 사상의 변화가 쉽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장인숙: 우리가 임수경이 북한에 왔다 갔을 때도 남한에 가면 당장 죽이는 줄 알았는데 임수경의 수기를 보니까 남한의 교도소가 난방 시설도 잘 안 돼 있고, 불편하다고 해서 ... 우리 북한 교도소는 난방이라는 것을 생각도 못하는 데 어떻게 그리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많이 가지고 있었거든요.
또 동구권 사회주의 나라가 다 망했을 때는 그 나라는 올바른 지도자가 없고, 지도 사상이 없기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북한은 우리식 사회주의를 고수하자고 했지만 결국은 사회주의로서 우리 인민들 한데 쌀밥에 고깃국 먹으면서 비단 옷을 입고, 기와집에 살게 해준다고 했지만 결국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할 때 뭔가 모순이 있고 이 길이 아니다 라고 해서 제가 단호한 조치를 취한 겁니다.
남한 생활을 시작하고는 98년 탈북여성들로 구성된 진달래회를 이끌고, 북한에서의 경험도 살려 정말 바쁜 나날을 보냈다는 것이 장 씨의 설명입니다.
장인숙: 여기 온 사람들 중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토목기사는 저 하나 밖에 없다고 합니다. 경의선, 경원선 건설, 개성공단 건설, 경수로 건설, 나진, 선봉, 금강산관광단지 건설을 비롯해서 토목기술을 요하는 모든 분야에서 제가 나름대로 북한에서 경험한 현황들을 있는 그대로 다 남한에 알려줬습니다.
북한에서 누리지 못했던 또 다른 자유와 편리한 남한 생활 속에서도 장인숙씨는 마음 한구석 늘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야 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장인숙: 사상이 전혀 다른 자본주의 체제를 완전히 몸으로 받아드린 다는 것도 힘들었고 가장 힘든 것은 나로 인해서 북한에서 형제들이 어떻게 고통 받을까하는 생각 때문에 항상 죄스럽고, 미안하고...그것이 가장 큰 정신적인 부담이고, 또 북한에서 누가 굶어 죽었다 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정신적으로 가장 힘듭니다.
이제 앞으로 남한 생활은 북한에서의 경험 그리고 7년 세월의 남한 정착생활의 경험들을 뒤따라 남한에 입국하고 있는 후배 탈북자들에게 알려 주면서 남북이 하나 되는 그날을 준비하면서 살고 싶다고 장 씨는 말했습니다.
장인숙: 한국에 와보니까 우리가 북한에서 너무 모르게 산 것이 많고요, 북한에 이제 어떤 나라라는 것을 알았을 때 하루빨리 통일이 돼서 남한과 같이 자유롭고, 인민들이 이주 걱정을 하지 않고, 고향을 왔다갔다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매순간을 어떻게 하면 내가 통일에 보탬이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회원들한테도 남한정착 생활을 잘해서 북한에 있는 내 가족들을 만났을 때도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서 북한 동포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생활이 있기를 희망할 따름입니다.
현재 장인숙 씨의 큰아들은 러시아에서 셋째 아들은 남한에서 각각 사업을 하고 있고, 막내 아들 정남 씨는 남한 연세대학교 법과대를 내년 2월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합니다.
이진서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