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북한인권법 20주년 기획]➃ 산골출신 탈북민의 LA 초밥집 요리사 도전기
2024.07.04
[앵커 멘트] 올해는 미국 북한인권법이 제정된지 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먹을 것을 찾아 중국 국경을 넘어 방황하던 탈북민들은 자신들을 난민으로 받아주는 미국으로 구름처럼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낯선 땅에 뿌리 내리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미국 북한인권법 제정과 미국 탈북민들의 정착이야기를 다섯편에 거쳐 보내드립니다. 오늘은 네번째 순서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미식가들의 입을 사로 잡는 스시, 즉 초밥집 책임 요리사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샘 현(한국명 현춘삼)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보도에 정영기잡니다.
[로스엔젤레스 한인타운] 차소리
고층 빌딩이 키돋음 하며 솟아 있는 번화한 로스앤젤러스 한인타운.
영동 설렁탕, 브룩스 스튜디오 등 한글 간판이 한집건너 하나씩 눈에 띕니다.
키낮은 건물이 지나자 20층짜리 고층 건물이 보이고,
그 아래에 스시집, 즉 일본 생선 초밥집이 나타납니다.
[식당 계단 내려가는 소리]
기자 일행이 SUSHI IPPO 일식집에 들어서자 검은색옷을 깔끔하게 입은 안내자가 마중나왔습니다.
[기자일행]안녕하세요?
[웨이터]누구세요?
[기자] 네, 오늘 모임이 있어 찾아왔는데요.
웨이터가 안내해준 좌석으로 가니 벌써 탈북민 여러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스시바에서는 까만 옷에 모자를 쓴 탈북민 샘현씨가 다른 요리사들과 초밥을 열심히 만들고 있었습니다.
[최한나씨] 헤드 셰프(책임요리사)가 사시미를 만들고 있어요. 지금 완전히 진짜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너무 맛있어서 사람들이 진짜 많이 와요.
초밥을 만드느라 대답할 사이도 없이 손을 잽싸게 놀리는 샘 현씨를 대신해 유엔을 통해 미국으로 함께 입국한 탈북여성 최한나씨가 설명합니다. 널직한 식당안에는 손님들이 앉을 수 있게 70~80개 좌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손님들이 꽉차면 주문이 쏟아지는데, 그때는 말할 시간도 없다는 겁니다.
[최한나씨] 나는 여기서 눈에 들어오는 게 문어 밖에 없어요.
또 다른 탈북여성 이백화씨도 스시바로 다가와 배모양의 스시 보트를 보며 신기해합니다. LA에 거주하는 탈북민 5명을 자기가 일하는 식당으로 초대한 샘현씨는 이들이 먹을 수 있게 커다란 보트 모양의 용기에 스시를 예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샘현씨] 자, 나갑니다.
[일행 중 한명] 우리가 가져갈까요?
[샘현 씨] 아니요. 웨이터가 가져갈겁니다.
웨이터가 식탁에 올려놓은 보트에는 여러가지 생선들이 보기 좋게 놓여 있었습니다. 스시는 일본의 대표적인 요리로, 한국어로는 초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스시는 생선, 조개, 유부(기름에 튀긴 두부), 닭알, 김 등의 식재료를 가지고 만드는 데, 그 가운데 식초를 약간 섞은 쌀밥위에 생선을 얹어 먹는 요리입니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생전에 스시를 즐겨 먹은 사실이 그의 전속 요리사로 일했던 일본인 후지모도 겐지씨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고급 요리 입니다.

[기자] 이 메뉴 이름이 무엇입니까?
[샘현씨] 이포 사시미 러브예요.
이포 사시미 러브(IPPO SASHIMI LOVE)란 샘현씨가 일하고 있는 가게 이름을 따서 만든 겁니다. 가족이나 친구 등 여러 사람이 여러 종류의 생선 요리를 맛볼 수 있게 큰 보트위에 생선과 초밥, 새우 튀김 등으로 모양을 냈습니다. 그 가운데 사시미, 즉 참치나 연어의 연한 살을 두껍게 져며낸 물고기를 얇게 채친 생무우 위에 올려놓았는데, 이것을 고추냉이 간장에 찍어 먹으면 별맛이라고 샘 현씨는 말합니다.
[이백화 씨] 이 메뉴를 좀 소개해주세요.
[샘현씨] 이게 오징어예요. 그리고 이건 고등어이고, 이건 생새우이고, 연어, 참치, 광어, 생새우 머리 그리고 이게 방어고요. 엘로우 테일이라고 해요. 그리고 빨간게 참치, 하얀 것은 광어, 이것은 생와사비예요.
네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사는 일본에서 처음 사람들이 스시를 먹기 시작하면서 전통 일본요리가 됐지만, 실제로 한국 사람들이 더 많이 식당을 차리고, 요리사도 한국 사람들이 많다고 그는 설명합니다.
[로스앤젤러스 거리 공원] 차소리, 사람들 웅성이는 소리
샘현씨의 고향은 백두산 옆에 있는 함경북도 연사군.
하늘 아래 첫동네라고 부르는 연사군은 날씨가 추워 주식을 감자로 먹는 산간 군입니다. 샘현씨는 어떻게 미국의 대도시 로스앤젤러스에서 헤드 셰프, 즉 책임 초밥 요리사가 되었을까?
[샘현씨] 처음 미국에 온 다음 저한테 선택지가 한 세곳이 생기더라고요. 하나는 자동차 정비하는 데 와서 배우라는 분이 있었고, 또 하나는 치과 치공하는 걸 가르쳐주겠다고 하는 분이 있었고, 또 한 분은 식당일을 배워주겠다고 하는데, 제가 미국에 금방 오자마자 겁이 많았어요. 왜냐면 자동차 정비는 손님이 뭐가 잘못됐다고 하면 영어가 안 돼서 그런 게 좀 두려웠어요.(웃음) 치공은 컴퓨터를 다루어야 하는데, 그게 또 겁났어요. 그래서 식당에서 그냥 몸으로 때우자하고 했는데 잘한 것 같아요. 기술 배우고 지금 이 자리까지 설 수 있었던 게 제 선택의 후회는 없고요.
하지만, 북한에서 스시라는 걸 보지 못한 산골출신이 제대로 배운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2009년 미국에 난민으로 입국한 샘현씨도 정착 초기에 한 한국인 요리사로부터 스시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샘현씨] 처음에 시작할 때 식당에 들어갔는데, 바로 스시 바에 세워놓더라구요. 속으로 세상에 이렇게 일하는 것도 처음 봤고, 뭐 스시라는 이름도 처음 들어봤는데 사수( 배워주는 요리사)가 저한테 김 하나 던져주면서 밥 롤 하나 만들어보라고 하시더라구요. (웃음) 그게 안 되죠. 손바닥에 막 벌집처럼 밥알을 묻혀 가면서 몇십 분동안 롤 하나 가르쳐주는 대로 했더니, 자르라 하더군요. 야, 스시 칼이 엄청 날카롭죠.
그걸로 자르려고 하는데, 그 날카로운 칼을 쓸줄 몰라서 막 톱질하듯이 겨우 잘랐더니, 접시에 담으라고 해서 또 담아보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엉망이에요. 엉망이죠. 먹으라 하는 거예요. 저보고 먹으라 하기 전에 “네가 손님이라면 이거 받아먹겠냐?”고 물었어요. 근데 한심하죠. 진짜 한심하지요. 막 슬펐는데 제가 못하니까.(웃음)
지금은 세상을 떠난 분이지만, 그때 그 요리사가 한 말이 지금도 와닿는다고 말합니다.
[샘현씨]그때 제가 그 분에게 “저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스시바에서는 열심히가 필요 없어. 잘해야 돼. 여기는 훈련하는 곳이 아니라 직접 손님한테 음식을 내보내는 곳이야. 경기장에 나선 선수가 잘해야 되는 거지, 열심히 하는 거 아니잖아? 무조건 잘해야 되는 거야. 그래야 메달 따고 단상에 올라설 수 있어”라고요, 참 그게 저한테 큰 동기부여가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그 스시를 배우겠다고 쉬는 날도 일부러 나와서 일하고 그렇게 하면서 나름 빨리 배웠고, 그래서 지금은 어느 경지에 올랐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까지 된 것 같아요.
샘현씨가 다른 가게로 옮겨간 다음에도 그분은 이따금씩 찾아와 손님으로 자신이 만든 스시를 들면서 지켜봐준 잊지 못할 분이라고 합니다.
[샘현씨] 그분 참 고마우신 분인데, 처음에는 저에게 뭘 시키는데 제가 일하느라 못 듣는 거예요. 그러면 막 화를 내고 타올도 던지면서 “왜 대답 안 하냐?”고 좀 엄하게 가르쳤죠. 저도 다른 가게 또 옮겨가야 되고 이렇게 옮겨가면 그분이 최소한 한 두 달에 한 번씩 저한테 찾아오더라고요. 손님으로 와서 먹어주면서 “어떻게 일하느냐?”하고 지켜봐주고 항상 전화로 “뭐가 불편한 게 없나? 너가 이런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할 거냐?” 하여튼 되게 많이 저한테 가르쳐주었어요. 한 60대 후반이셨는데 그렇게 저하고 약 12년동안 연락을 하고 지내다가 안타깝게 돌아가셔서 지금도 가끔 고마운 생각 많이 나고 그렇죠.
이렇게 스시를 배운 샘현씨가 책임요리사 자리에 오기 까지는, 하나의 특별한 일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연인즉, 어느날 샘현씨가 일하는 가게에 식사하러 온 손님이 토로라고 하는 사시미를 찾았는데, 이미 그 전날 냉장시킨 토로가 없었다는 겁니다. 다른 요리사는 손님에게 토로가 아닌 다른 주문을 하면 안되겠냐고 했지만 샘현씨는 그 손님의 주문을 취소시키는 대신 약간의 남새요리를 내보내고 손님이 그것을 먹는 동안 언 토로를 잘라낸 다음 손바닥으로 녹였다는 겁니다. 주인은 이 사연을 알게 되었고, 신임을 얻은 샘현씨는 LA 한인타운에서 손꼽히는 스시 식당에서 책임 요리사로 승진했다는 겁니다.
[기자] 고향이 함경북도 연사군이신데요. 북한에 있을 때는 이런 생선을 본적이 있나요?
[샘현씨] 아니요. 전혀 생선을 만져도 못 봤고, 아마 우리 어릴 때는 그런 것만 봤지요. 생선은 없고 개울가에서 친구들과 학교 갔다 오다가 다리 건느다 말고 가방 다 개울가에 내려놓고 물에 들어가서 이렇게 손잡이로 물고기를 잡았는데, 저는 그거 한 마리도 못 잡아봤어요. 그때는 친구들이 어죽 써먹는다고 누구는 된장, 누구는 야채, 누구는 쌀 이렇게 조금씩 가지고 와서 물고기 잡아서 어죽 써먹었는데, 북한의 쌀에는 막 돌도 있었잖아요. 북한은 막 이렇게 쌀을 일어 먹는다고 하죠. 쌀 함박도 없어 우리 어릴 때 돌이고 뭐고 어죽 가마에 같이 넣어서 끓여 먹어도 돌 한 번 안 씹고 먹던 기억이 나요. 진짜 맛있었죠.
[샘현씨 집] (문을 닫는 소리)
[탈북민 일행] 반갑습니다.
샘현씨는 2008년 중국 베이징 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을 통해 미국으로 입국할 때 함께 온 최한나 씨와는 이웃에서 살고 있습니다. 미국에 와서도 친척처럼 다정하게 지내는 두 사람이 이따금 만날때면 고향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샘현씨] 우리가 미국 들어올 때가 난민으로서는86번, 89번 이렇게 번호를 갖고 들어왔어. 우리가 100번 째 밑으로 들어왔어요. 나는 한국 갔으면 차라리 나야 잘 살지. 그런데 저애(샘현씨 아들 아리를 가리키며) 때문에 미국 들어온 거죠. 저애들이 한국에서는 교육 못 따라가요. 그래서 애 때문에 미국으로 오기로 결정한 거지.
고향의 가족 이야기를 하며 샘현씨의 눈시울은 금방 붉어집니다.
[샘현씨] 나는 (함경북도)연사군이라는 곳에서 무산이라는 곳으로 내려와야 되고, 그전에 이미 탈북을 한 번 했다가 잡혀서 감옥 생활을 했던 사람이고, 연사에서1년을 감옥에서 살다 나와서 보위부에서 감시했지요. 그런데 다시 탈북을 하다가 두만강 물이 불어서 죽을 뻔했어요.
샘 현씨는 강원도에 주둔하고 있는 북한군 1군단에서 13년을 복무하고 화선입당까지 한 충성분자였지만,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오자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샘현씨] 1992년도 나는 군대에 가고 3남 1녀 중에 내가 막내 아들이에요. 그런데 13년 군대 복무하고 들어오니까, 아빠가 굶어 죽었어. 나는 군대 가 있고 우리 아빠는 1995년 미공급이라 굶어 죽은 거지. 찌꺽다리(절음발이) 병신이 당연히 제일 먼저 굶어 죽어야지…(흐느끼며) 우리 누나는 시집 갔다가 아빠 돌아가신 거 알고 왔다가 아빠 장례 끝나고 온 가족 데리고 탈북했고, 그리고 우리 엄마는 누나 찾는다고 중국으로 찾아다니다가 교회에 다녔나 봐요. 그러다가 교회에서 잡혀갔고, 온성보위부로 끌려나와서 온성보위부에서 맞아 죽었어요. 그것도 모르고 나는 군대에서 계속 충성맹세를 하고 살았고… 되게 웃겨요.(허탈한 웃음을 지우며) 내가 책을 지금 쓰고 있는데, 거기에 다 쓸거예요.
산산 조각난 집을 보면서 샘현씨는 북한땅에서 살 용기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두만강을 건너게 되었고, 2008년 중국 베이징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을 통해 미국으로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샘현씨는 지금도 두만강을 넘다 물에 빠져죽은 두살짜리 딸애를 묻고 온 중국의 어느 한 산야를 구글지도로 찾아봅니다.
[샘현씨] 어쨌든 나중에 애들도 크고, 김씨 정권이 안 망하면 탈북자들이 계속 들어올 거잖아요?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들어올 것이고 그런 사람들한테 탈북 1세대들이 미국와서 어떻게 살았는지, 진짜 잘 살았다, 잘 싸웠다 그런 게 있어야 되는 거지. 당연히 그렇게 살고 싶고….
전문 요리대학이나 학원을 다니지 않고도 현장에서 직접 뛰며 스시를 배운 샘현씨. 지금도 스시바에 서서 손님들이 뭘 원하는지 음식을 개발하고, 어떤 소스를 선호하는지 눈여겨보고 장인의 정신으로 자기 직업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앵커 멘트] RFA 자유아시아방송 기획 특집, <미 북한인권법 20주년- 미국에 뿌리 내린 탈북자들”
지금까지 네번째 순서로 “산골출신 탈북민, 미국 초밥집 책임 요리사 도전기”를 보내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마지막 순서로, “서로 손 잡고 이끄는 미국 서부 탈북민들”편을 보내드립니다. 지금까지 보도에 RFA 자유아시아방송 정영기자였습니다.
에디터 이진서,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