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정변 모의한 유학생들 대량처형

김주원∙ 탈북자
20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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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대 학생들이 컴퓨터를 이용해서 공부를 하고 있다.
김일성대 학생들이 컴퓨터를 이용해서 공부를 하고 있다.
AFP PHOTO/PEDRO UGARTE

북녘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탈북자 김주원입니다. 지난 시간 저는 성분제도에 따라 운명이 대물림 되는 북한사회의 실상을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1993년에 있었던 소련 군사유학생들의 군사정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 드리려 합니다.

일명 ‘프룬제 군사대학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소련의 군사학교와 군사아카데미에서 유학생활을 한 군사간부들이 김일성 정권을 끝장내기 위해 1993년에 모의한 군사정변 사건입니다.

프룬제는 ‘공민전쟁(내전)’ 당시 소련 군사장관의 이름입니다. 사회주의 혁명에서 승리한 후 소련군은 왕정을 지지하는 백파군(백군파)과 무정부주의를 지향하는 봉기군과 ‘공민전쟁’을 치렀습니다. 1918년에 시작된 ‘공민전쟁’은 1925년 레닌이 이끄는 ‘붉은 군대’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공민전쟁’에서 ‘붉은 군대’가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 중에는 기동전과 적 후방을 교란하는 종심전을 비롯해 현대전의 개념을 정립한 소련 군사장관 프른제 장군의 역할이 컸습니다. ‘공민전쟁’ 후 소련은 군 간부들을 양성하기 위해 군사학교들을 잇달아 설립하였습니다.

초기 이런 군사학교들은 지역의 이름을 따 ‘볼고그라드 군사학교’, ‘모스크바 사관학교’ 등의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군사학교들은 현대전의 개념을 창시한 프룬제 장군의 명칭으로 이름을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주의가 붕괴될 때까지 소련 가맹공화국 각지에 있던 ‘프룬제 명칭’ 군사학교들에는 동유럽 나라들의 군사 간부들이 많이 유학했습니다. 북한도 1950년대부터 김창봉, 오진우와 같은 군사지휘관들을 소련에 유학 보냈습니다.

하지만 소련공산당의 수정주의를 비판한 김일성은 1960년대부터 ‘프룬제 명칭’ 군사학교들에 유학생을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1984년 5월 동유럽 방문 시 소련공산당 서기장 콘스탄틴 체르넨코와 군사유학생 문제에 합의했습니다.

북한으로선 현대전에 뛰어난 고급 군사간부와 국방과학자 양성이 절실했었습니다. 군사유학생 문제에 합의한 김일성은 1986년부터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는 물론 소련의 각 가맹 공화국들에 있는 ‘프룬제 명칭’ 군사대학들에 유학생을 파견했습니다.

1986~1990년까지 5년 동안 해마다 북한은 장령급으로부터 일반군관(장교) 50여명을 선발해 소련에 군사유학을 보냈습니다. 주로 항일투사 자녀들과 전사자 가족 등 북한에서 최고의 출신성분을 가진 군 지휘관들이 유학대상이었습니다.

소련이 붕괴되기 전인 1986년부터 1990년 사이 ‘프룬제 명칭’ 군사학교와 군사기술아카데미에 유학한 군 지휘관들은 250여명 정도였습니다. 현직 군사지휘관들은 주로 군사학교들에서 공부했고 제2자연(군사)과학원 산하 국방대학, 룡성약전공업대학, 미림대학 학생들은 군사아카데미에 파견됐습니다.

소련은 프룬제아카데미, 주코프아카데미, 보로실로프아카데미와 같은 군사학술연구기관과 함께 크라스노다르 비행사양성소와 레닌그라드의 잠수함군관양성소와 같은 군사기술대학들도 운영했는데 여기에도 북한은 많은 유학생들을 보냈습니다.

이런 군사대학과 연구기관들에는 동유럽의 군사간부들도 유학을 많이 왔었는데 북한 유학생들은 그들에게 ‘사회주의 조선’의 우월성을 선전했습니다. 그때마다 동유럽 유학생들은 북한을 개인숭배에 기초한 ‘스탈린 식 독재국가’라고 비판했습니다.

동유럽의 붕괴과정을 지켜보면서 북한의 유학생들도 ‘주체사상’에 기초한 개인숭배가 노골적으로 조장되는 김일성 식 사회주의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고 봉건시대에나 있을 법한 김정일의 세습권력에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사회주의 독재에 불만을 품은 북한 유학생들은 새로운 체제를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김일성 유일독재 정권을 무력으로 뒤엎고 민주주의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새롭게 건설하자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었습니다.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군사정변 모의는 최룡해의 매부였던 홍계성이 이끌었습니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인민군 부총참모장으로 승진한 홍계성에게 1992년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른 김정일이 직접 상장의 견장(계급장)을 달아주었습니다.

홍계성과 함께 김일성의 외가 친척이었던 인민무력부 작전국 부국장 강영환도 쿠데타의 핵심인물이었습니다. 여기에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하고 ‘프룬제 명칭’ 군사아카데미에 유학한 인민무력부 작전부처장과 전투훈련국장 안종호도 합세했습니다.

그들은 인민군창군 60주년이 되던 1992년 4월 25일 열병식 주석 단에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땅크(전차)로 제거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소련 ‘프룬제 명칭’ 군사학교 출신의 사단장 5명이 거느린 무력도 쿠데타 계획에 합류했습니다.

열병식에 동원된 전차는 프룬제 유학파 출신 김일훈 소장이 관할하는 수도방위사령부 땅크사단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일성의 고종사촌인 인민무력부 국장 박기서가 수도방위사령부의 땅크를 동원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일이 꼬였습니다.

인민무력부가 주도하는 행사에 수도방위사령부의 땅크를 동원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수도방위사령부 대신 인민무력부의 땅크가 열병식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초기 쿠데타 계획은 이렇게 실패했습니다.

러시아는 소련에서 공부한 유학생들을 통해 이런 사실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첫 쿠데타 음모가 실패하자 기존 소련 국가안보위원회(KGB)의 한 간부였던 자가 당시 러시아 대사였던 손성필에게 쿠데타 모의를 고발했습니다.

‘프룬제 명칭’ 소련 유학생 출신들의 쿠데타 음모는 이렇게 드러났습니다. 김정일은 군사아카데미 유학생 출신들을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들”이라고 분노하면서 인민군 보위국에 무자비하게 소탕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1993년 2월 8일 인민무력부 8호동 회의실에서 중대회의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도착한 ‘프룬제 명칭’ 군사학교와 군사아카데미 유학생들을 향해 인민군 보위국 국장 원홍희가 지휘하는 작전조가 전격 투입되었습니다.

인민군 총참모장 최광과 보위국장 원흥희가 주최한 이날 회의에서 최룡해의 매부였던 인민군 부총참모장 홍계성 상장과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 부국장 강영환 중장, 재정국장, 통신국장, 교육국장 등 장령급 지휘관 70여명이 체포되었습니다.

보위국장 원흥희가 이름을 부르면 보위국 하전사 2명씩이 호명된 그들에게 다가가 총구를 들이댔습니다. 군관 1명이 그들의 군복에서 김일성 초상휘장과 훈장, 견장을 떼어 내고 신분증을 회수하면 병사들이 족쇄를 채운 후 끌고 나갔습니다.

그 순간부터 1998년까지 5년간에 걸쳐 ‘프룬제 명칭’ 군사아카데미 유학생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뤄졌습니다. 인민무력부 총정치국과 총참모부는 물론이고 각 군단, 사단, 여단의 모든 소련 유학생 출신들이 모두 조사를 받았습니다.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 무관 김학산 중장과 부무관이던 최수연 대좌도 1997년에 체포되었습니다. 1993년 말 김책공군대학에서 재직하던 유학생 17명은 평양역 부근에서 크게 저항해 인민군 보위국 1개 중대가 동원되어 겨우 제압했습니다.

‘프룬제 명칭’ 군사아카데미의 쿠데타 모의가 실패한 후 그 공로를 인정받은 인민무력부 보위국은 인민군 보위사령부로 승격됐고, 보위국장이었던 원흥희는 보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중장에서 단숨에 대장으로 승격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30여 명의 장령과 100여 명의 좌급 군관, 70여 명의 위급 군관 등 도합 200여 명의 소련 군사아카데미 유학생 출신들이 총살되었습니다. 살아남은 일부 유학생들은 군복을 벗은 채 지금도 북한 당국의 감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사건’ 이후 북한은 외국에 군사 유학생을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1995년 김정일은 ‘프룬제 명칭’ 유학생 쿠데타 사건을 보고받으며 ‘이제는 사회(민간)에서도 총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보위사령부는 북한의 주요도시들을 검열했는데 1998년 양강도 혜산시에서만 2백여명의 당, 행정, 사법기관 간부들을 공개 처형하거나 비공개로 살해했습니다. 당시 양강도 보안국 이성훈 수사처장은 망치로 살해당했습니다.

그날의 군사정변 모의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김정은 정권이 인민군 고위 장령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북한의 또 다른 애국군인들이 김정은 정권을 노리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현실입니다. 불을 즐기는 자는 불에 타 죽는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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