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최고인민회의 상무부위원장 김원봉의 숙청(2)

김주원∙ 탈북자
2018-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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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
경남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
연합뉴스 제공

북녘동포여러분, 북한의 3대 세습은 숙청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진 김씨 일가의 숙청정치로 귀중한 목숨을 잃은 수백여 명의 반일애국투사들 중에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무부위원장이었던 김원봉도 처참한 숙청의 희생자였습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김일성에 의하여 김원봉이 숙청되던 과정에 대하여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의열단장, 조선의용대장, 민족혁명당 총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부장 등으로 활동하였던 김원봉 선생은 해방 이후 넉 달이 되어오던 12월에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하였습니다. 물론 고향이 대한민국 경상남도 밀양인 그가 귀국한 곳은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 서울이었습니다.

김원봉이 귀국한 당시인 1945년 12월에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는 미국과 영국, 소련 3개국의 외무장관들이 모여 일제가 패망하고 그 점령지역에 대한 관리문제를 가지고 거의 열흘이 넘게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라고 부릅니다. 이 회의에서 합의문이 발표되었는데 일제의 통치를 결산하고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하는데 있어 한반도의 남쪽은 미국이, 북쪽은 소련이 임시로 신탁통치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신탁통치 반대파들과 찬성파들이 거센 충돌이 지속되는 과정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2월 30일에 포고령을 내려 전국민 파업을 지시했습니다. 찬성파들은 1946년 1월 3일 서울에서는 10만여 명이 모여 ‘조선자주독립 민족통일전선결성촉성 시민대회’가 열렸고 3상회의의 합의문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가 표명되기도 하였습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의열단 단장이며 좌파 단체인 민족주의 민주전선에서 활동한 김원봉은 신탁을 반대하는 행위를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비유하여 비판을 하였고 1946년 2월에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공동의장 5인 중의 한사람으로 추대되었습니다.

항일성전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김원봉은 해방이 되어서도 좌우로 갈라져서 서로 싸우는 비극을 보면서 좌우합작을 위해 활동하는 인민당 당수였던 여운형을 도와 나섰습니다. 김원봉은 1947년 3월 22일에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의 총파업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경찰에 체포되어 ‘빨갱이 두목’으로 취급을 받으며 조사하던 경찰에게서 구타를 당했습니다. 18일 동안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면서 조사를 받은 김원봉은 4월 9일에 무혐의로 석방되었습니다.

1947년 7월에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던 여운형이 암살되자 '광명일보'와 '노력인민' 등 좌익계열의 신문들에 '여운형의 유지를 받들어 미소공위를 성공시키자'는 호소문을 발표하였습니다. 김원봉에 대한 테러가 빈번히 발생하면서 8월 12일에는 자택이 습격 당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인민공화당의 사무실이 폐쇄되었습니다. 인민공화당의 전신은 조선민족혁명당입니다. 임시정부안에서 좌익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민족혁명당은 1935년에 결성된 당으로서 해방되어 1946년에 인민공화당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은 조선민족혁명당의 총서기로,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면서 당위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48년 1월에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을 방문하여 김원봉과의 면담을 요청할 정도로 김원봉은 해방 후 남한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1948년 4월에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김구, 김규식, 박헌영, 리극로 등 남측 정치단체 대표의 한 사람으로 협상에 참가하고 나서 그는 북한에 머물렀고 더 이상 남한에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는 북한에 머물었던 자신에 대해 중국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쪽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고 한 것을 보면 그는 공산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빨갱이로 취급되면서 테러에 시달리던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김원봉은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주석단 성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인민공화당 대표 자격으로 축사를 하기도 하였고 연석회의 사회를 맡기도 하였습니다. 두 달 후인 1948년 6월 29일부터 일주일동안 진행된 ‘제2차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가하였고 8월에 진행된 북조선인민위원회 최고인민회의에서 제1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9월 9일에 북한정권이 수립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국가검열상에 임명되었습니다.

1949년에 들어서면서 김일성은 전 조선을 공산화하여 지배하려는 야욕을 품고 스탈린과 모택동을 찾아다니며 전쟁승인을 받으려고 여러 차례 소련과 중국을 찾아다녔습니다. 1950년 4월 하순에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으로부터 남침전쟁에 대해 동의를 얻었고 5월 13일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모택동으로부터 남침에 대해 동의를 얻은 김일성에게 김원봉은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을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남쪽에는 탱크가 한 대도 없었고 군사력도 부족하였지만 북한에는 이미 240여대의 소련제 탱크와 수십만의 중국 팔로군 출신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김원봉의 주장은 남침전쟁을 하게 되면 세력이 약한 대한민국을 도와 미국이 참전할 것이고 그러고 나면 오랜 전쟁으로 많은 희생자들이 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러한 주장을 묵살한 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남침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전쟁의 비극은 김원봉의 가족에도 들이닥쳤습니다. 한국 전쟁의 과정에서 그의 형제 4명과 사촌동생 5명이 월북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총살당하거나 살해되었습니다. 동생 김봉철, 김학봉만이 살아남았고 그의 아버지 김주인은 유배되었다가 굶어 죽었습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5월에 그는 국가검열위원장직에서 해임되고 내각 노동상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56년 7월 19일에 박헌영이 총살형에 처해지고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으로 그해 8월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최창익 부수상 등 연안파가 ‘반당·반혁명 분파’로 몰려 숙청되었지만 김원봉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역임하였고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58년 3월에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의에서 김일성종합대학 초대총장,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이었던 김두봉도 숙청당하였지만 김원봉은 노력훈장을 수여받으면서 당시에도 건재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1958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되면서 김원봉에게도 검은 구름이 덮히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김원봉은 1956년 8월 종파 사건을 계기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및 중앙인민위원회 상무위원직에서 해임되었고, 1958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되어 모든 정치적 지위를 상실했습니다.

김일성은 8월종파사건으로 김원봉을 숙청하면서 그에게 '중국 국민당 장개석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김원봉의 최후에 대하여 북한정권은 극비에 붙이고 있어 자세한 최후는 아직도 불투명하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김원봉이 분에 못 이겨 스스로 청산가리를 먹고 자결했다는 것입니다.

의열단 투쟁을 진두지휘하였고 조선인 조직으로는 처음으로 중국국민당 정부로부터 항일무장세력으로 인정받고 지원을 받은 부대였던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대장을 지냈고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역임했던 김원봉은 60세 나이에 김일성에게 이용당한 정치인이자 무장이었지만 그의 마지막 생은 숙청으로 사라진 비운의 생이었습니다. 정치권력의 영구화를 위해서라면 그가 애국자이건 혁명가이건 무자비하게 처형하였던 김일성의 숙청정치는 김정일과 김정은으로 여전히 이어오고 있지만 북한의 3대 세습도 종말을 고할 날만 남았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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