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무용가 최승희 남편은 월북 문학평론가
2024.09.28
MC: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서울의 탈북 소설가 도명학 작가와 함께 남북한의 문학세계를 들여다보는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입니다. 저는 미국 워싱턴의 홍알벗입니다. 도명학 작가와 전화 연결돼 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도명학: 네, 안녕하십니까.
MC: 선생님, 오늘은 작가나 작품이 아닌 '문학평론가'를 한 분 소개해 주시겠다고요? 어떤 분인가요?
도명학: 네 오늘은 월북 후 북한에서 문학평론가를 거쳐 정치인의 삶을 살았던 '안막' 선생에 대해 이야기할까 합니다.
MC: 솔직히 저는 안막 선생이 굉장히 낯섭니다. 어떤 인물이었었는지 간략하게 설명 좀 해 주시죠.
도명학: 네. 안막에 대해서는 북한에서도 신세대들은 알지 못합니다. 문인들도 나이 많은 작가들이나 알 정도로 오래전에 존재감이 사라진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평론가 안막은 경기도 안성에서 1910년에 출생했고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일본의 와세다 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유학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과정에 사회주의 계열 문예운동가 최승일이 자기 여동생 최승희를 소개해주어 1931년에 결혼하였습니다. 최승희는 조선의 전설적 무용가로 명성을 날린 인물입니다.
안막은 1930년대 초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손꼽히는 이론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고, 카프 시절에 쓴 평론으로는 “프로 예술의 형식문제 -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의 길로”, “조선 프로예술가가 당면한 긴급한 임무”, “창작 방법 문제의 재토의를 위하여”가 있습니다. 그는 같은 일본 유학파이며 소장파인 임화, 김남천, 김기진을 비판하는 내용의 평론을 썼는데 1930년대 중반 카프가 해체되고 투옥된 이후에는 두드러지는 활동이 거의 없었으며 아내 최승희의 매니저 역할에 전념하였습니다.
광복 후에는 곧바로 월북했고, 1950년대 중반에 문화선전성 부상을 지내는 등 북한 내각의 고위직에서 일했으나 1958년 소설가 한설야 제거에 대한 사전 작업으로 카프 계열 문학 인사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질 때 서만일, 윤두헌과 함께 부르주아 평론가로 몰려 숙청되었습니다.
참고로 유명한 동요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가 안성현이 안막의 조카라고 합니다.
MC: 안막 선생의 평론은 어떤 사상이나 이념에 근거를 둔 것이었고, 또 어떤 방향으로 비판을 펼쳤나요?
도명학: 안막의 주요 이론들은 마르크스주의적 문학관의 정리나 재확인에 그치는 것이 많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등장한 것은 내용-형식 논쟁의 급물살이 지나간 1930년대였고 당시 새로운 의견 개진은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문학관이라는 대전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가운데 안막은 실제 작품 비평은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안막은 일제 강점기 대부분의 평론을 신문에만 실었습니다. 안막이 임화, 김남천, 김기진 등 동시대 다른 비평가들과의 차이를 보이는 또 다른 현상은 작품 발표를 병행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안막은 일제강점기 두 편의 시를 발표한 것 외에 창작을 하지 않아 이론과 실제 작품을 병행한 다른 작가들과 달리 주목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당시 안막은 번역에 치우친 프롤레타리아 문학 비평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십여 년에 이르는 카프 문학 전반을 반성하면서 이탈을 시작했습니다. 안막이 날카롭게 지적한 것은 당시 일제의 검열제도에 순응하는 식의 글들이었고, 다른 프롤레타리아 문인들과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MC: 당시, 안막 선생의 문학비판은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켰나요?
도명학: 안막의 평론은 과도한 정치적 편향성을 고민하는 외에 대중성과 프롤레타리아 독자성만을 일관적으로 너무 고집스럽게 주장한다는 반응이 있었지만 한편으론 폭넓은 문화 이해력과 외국의 문화 섭취력은 놀랄 정도라는 평이 있었습니다.
MC: 안막 선생의 평론이 근현대 한국 문학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도명학: 안막은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된 해에 태어난 식민지 지식인들과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대립하며 한국문학의 이론적 정초를 마련하는데 기여했습니다. 특히 1930년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돼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주도하며 예술의 창작과 내용 방법에 대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표방했고 이것은 광복 후 월북한 북한에서도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 발전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MC: 안막 선생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문학의 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도명학: 안막은 자신이 비평과 시를 통해 대중을 사회주의적 이념으로 계몽하려고 했습니다. 그랬기에 광복 후 안막은 그것을 펼칠 수 있는 곳으로 북한을 생각했고 그 체제 내에서 아내 최승희와 함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성공하는 세상을 볼 수 있으리라 판단했던 것입니다. 러시아문학을 전공하며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길을 걸었던 안막의 월북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MC: 안막 선생의 부인은 유명한 무용가인 '최승희'죠. 문학과 예술의 만남이라고도 볼 수 있을 거 같은데 말이죠. 무용가 최승희는 어떤 인물이었나요?
도명학: 최승희는 1911년 11월 당시의 경기도 경성부에서 출생하여 한때 강원도 춘천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뒤 경성부에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두 차례 일본 유학을 한 후 조선에서 독자적인 근대 무용 공연을 가지면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모으게 되었고, 1936년 “반도의 무희”라는 영화에 출연하고, 자서전 “나의 자서전”을 출간할 정도로 유명해졌습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수년 동안 칠레 등에서의 해외 순회공연을 벌이면서 세계적인 명성도 얻었습니다.
그러다 광복 후 남편인 안막을 따라 월북해서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세워 소장에 취임하고 공훈배우, 인민배우 칭호를 받은 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까지 되었는데, 1958년 남편 안막이 숙청되면서 연금당했다는 설이 나돈 이래, 행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34년 뒤인 2003년 2월 한설야와 함께 복권되었고, 같은 해 애국렬사릉에 안치됐는데, 이 역시 한설야와 마찬가지로 김일성의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최승희 공적을 높이 평가한 결과였습니다.
MC: 부인 최승희가 남편인 안막 선생의 평론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도명학: 최승희가 안막의 평론 활동에 영향을 끼친 것이 있다면 아마 남편이 문학평론 활동을 중단하다시피 하게 하고 아내의 매니저 역할을 하게 한 점이랄지, 남편 안막은 문학도 중요하지만 보다는 전설적 무용가인 아내의 사회주의적 무용 활동을 통해 자신이 꿈꾸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MC: 문학과 예술, 특히 그 중에서도 무용과는 어떤 연관성이 얼마나 있을까요?
도명학: 문학과 연관성이 없는 예술 장르는 없다고 봅니다. 영화, 드라마, 연극 등 스토리 장르는 물론이고 노래 작곡도 가사에 영향을 받습니다. 미술가들도 문학작품에서 영감을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무용은 몸놀림뿐인데 문학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할 수 있으나 무용 역시 펜 대신 몸동작으로 쓰는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MC: 자료를 찾아보니까, 안막 선생은 출생일은 있는데 사망일이 없더군요. 말년에 숙청을 당했다는 말이 있는데. 안막 선생은 왜 최후의 순간이 사라져 버렸을까요?
도명학: 숙청된 사실은 북한에서도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됐는지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숙청 이유도 북한에서 흔히 뒤집어씌우는 종파 행위라는 것밖에 모르고, 그가 쓴 평론도 숙청 후 전부 회수되고 없어 신세대인 저는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MC: 북한에도 문학평론가가 있나요?
도명학: 평론가가 당연히 있습니다. 조선작가동맹에 평론분과가 있습니다. 북한에서도 평론이 필요한 이유는 작품의 사상성과 예술성에 대해 분석 평가해야 사회주의 문학을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인데, 평론가들을 괜한 시비꾼으로 여기는 작가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문학창작을 공부하는 문학도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됩니다. 저도 실제 작품을 놓고 분석한 평론들을 읽기 좋아했고 그것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북에서 시만 쓰던 제가 남한에 와서 한번도 써보지 못한 소설을 써서 단박에 소설가로 등단할 수 있은 것도 북한에서 소설 평론들을 많이 본 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MC: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저희는 다음 주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선생님,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도명학: 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에디터 이진서, 웹편집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