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벌주의의 최대 희생자가 된 북한

주성하∙ 탈북자, 동아일보 기자
2014.03.28
kimilsung_statue-305.jpg 북한 주민들이 만수대언덕 김일성동상을 참배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역사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엔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는 속담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감사면 다 평안감사인가”라는 속담도 있죠. 감사면 지금 북한으로 치면 도당책임비서와 같은 직위라고 볼 수 있겠네요. 이 속담을 보면 평안감사가 다른 감사들보다 훨씬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점은 이조시기 8도 감사 중에 왜 하필이면 평안도 감사만 이렇게 떴을까 하는 점입니다.

평안도 감사가 다른 감사보다 급이 높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감사는 모두 정2품 판서보다 한 단계 아래인 종2품이었습니다. 참고로 북에선 역사 교육을 홀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잘 모르는데, 그에 비하면 여기 남쪽 사람들은 역사에 대해 북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해박합니다.

평안감사가 인기가 있었던 이유를 남쪽에 와서 이야기도 들어보고 책으로도 보니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평안감사는 완전히 꽃자리였다고 합니다. 이북 지역은 경치도 좋고, 아름다운 여인도 많아서 술판 벌이고 주색을 잡기엔 평안 감영이 자리한 평양만한 지역도 없다고 합니다. 평양기생 하면 예로부터 아주 유명하지 않습니까.

두 번째 이유는 평안도 지역이 중국과의 교역의 요충지에 있다보니 좋은 물건들을 구하기 쉬웠습니다. 중국에서 당시 들여오던 서구의 진귀한 물품들의 목적지는 왕궁이 자리하고 있는 서울이 목표입니다. 거기까지 들어오면 그 아래 지역에 있는 감사들은 왕이 배분해야 만이 좋은 물건 한번 만져보는 것이죠. 그런데 평안 감사는 서울에 가기 전에 빼돌릴 수 있었으니 부정부패하기 좋고 진귀한 물품 마음대로 쓰고 살 수 있는 지역이죠.

거기에 평안도 지역이 옛날에는 험준한 산악지역이다 보니 예전에는 호랑이 가죽이나 산삼과 같은 비싼 진상품들이 많이 나니까 왕에게 눈에 들 수 있는 여지도 상당히 많아서 또 괜찮은 자리입니다.

마지막 이유는 평안감사의 권한 때문입니다. 북한 많은 지역은 고려 시기만 해도 여진족들이 작은 마을을 이루어 거주하던 땅이었습니다. 고려시기에 쌓은 천리장성을 보면 함남 영흥에서 평북 의주까지를 있는 선인데, 지금의 함경도 대다수 지역, 평북에서 개천, 의주를 잇는 선 이남만 고려의 실질적 통치권에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려 말기 공민왕 때부터 슬슬 위로 올리 밀었고, 1430년대 김종서와 최윤덕 장군이 4군 6진을 개척하면서 비로써 오늘날의 국경이 형성됐습니다. 그러니까 조선 초기 평안감사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평안도 대다수 지방이 조선 영토로 확실히 자리 잡은 지 얼마 안됐을 때였습니다.

바로 이 점이 평안감사 자리가 다른 지역보다 더 낫다고 인식하게 만드는 요인이 됐던 것입니다. 경상도나 전라도, 충청도 등 남쪽의 다른 지방에는 수백 년 동안 뿌리 내려 온 소위 뼈대 있는 가문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어지간한 족벌로는 감사가 되기도 어려웠지만, 설사 지방에 부임돼 내려가면 이런 문중 세력들과 힘겨루기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부임 행차부터 어디까지 나가서 마중하느냐를 두고 신경전이 팽팽했고 임명돼 정무를 수행하려도 곳곳에서 방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평안도에는 공권력에 반기를 들 뿌리 깊은 문중이 적다 보니 감사가 부임만 되면 그 지역에선 완전히 왕이 되는 것입니다. 머리 아플 일도 별로 없고요. 이조 500년 역사를 보면 유명한 인물들 중엔 북쪽 지역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왕조 내내 중앙정부에서 배제되고 차별을 받으니 묘청의 난이나 홍경래의 난과 같은 폭동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이것도 역시 유력 가문이 발달하지 않은 북쪽의 특성과 관련된다고 봅니다.

저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북에 독재체제가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좋은 풍토가 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물론 이것이 역사책 어느 곳에서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런 영향도 고려해서 북한을 봐야 하는 것 아닐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김일성이 지방주의, 연고주의가 심한 남쪽을 다스리게 됐다 이러면 과연 독재가 쉽게 뿌리내렸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100여 년 전에 평안도에 천주교와 기독교가 크게 번창해 평양을 제2의 예루살렘이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중앙에서 배제된 북쪽 사람들이 유교를 버린 이를테면 정신적 반역이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합니다. 김일성은 가문이나 족벌, 지방주의가 통치에 방해가 되는 것을 알아서 싹이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없애버렸습니다. 그래서 북에선 족보도 모두 불태웠습니다.

그런데 남쪽에 오니 북한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더군요. 경상도, 충청도 이런 지역에 가면 각 지역마다 유력 문중이 있고, 족보가 엄청 발달돼 있습니다. 같은 가문이면 타지에 살아도 족보에 근거해 관계망이 잘 발달돼 있고 “우리가 남이가” 이러면서 서로서로 잘 끌어줍니다. 북한은 6촌만 넘어가면 그다음엔 얼굴보고 살 일도 별로 없는데, 여기는 10촌, 15촌 뭐 이런 것까지 족보책 보고 연구해서 인연을 만들어갑니다.

북한에 살 때 김일성이 지방주의, 족벌주의를 타도하겠다고 그렇게 외쳤는데 알고 보니 그건 김 씨 일가가 왕국을 세우고 독재를 쉽게 해먹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좋았다는 평안도 감사 정도가 아니라, 아예 왕조를 차려놓고 진짜 왕이 된 것입니다. 그토록 족벌을 타도하겠다더니 자기 가문은 백두혈통이란 것을 내세우고 오직 족벌이란 이유만으로 왕위를 세습하고 권력을 나눠 가졌습니다. 인민들의 족보는 다 없애게 하고, 김 씨 일가 족보는 유치원 때부터 시작해 대학까지, 아니 평생 학습을 통해 달달 외우게 합니다. 결국 북한 인민만 김 씨 족벌의 최대 희생자가 된 셈입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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