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원희
6.25 전쟁이 일어나기 3년전 사상범으로 북한내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돼있다 전쟁직전 석방돼 미군들과 함께 북한 인민군과 중공군들을 상대로 싸웠던 한 남한 청년이 지금은 8순 가까운 노인이 됐습니다. 학도병으로 자원해 미군과 함께 6.25 전쟁을 치룬 김영철씨는 전쟁후, 미국으로 와서 신학공부를 하고 기독교 목사로 40여년을 활동하다 지금은 은퇴해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김영철 목사가 회고하는 6.25 전쟁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1947년 학생이었던 김 영철 목사는 구 소련 정보부에 억류되어 있던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을 구출하기 위한 비밀 조직을 만들어 구출 운동을 하다 잡혔습니다. 그는 사상범으로 함흥, 흥남 등의 정치범 수용소를 전전하다 아오지 수용소에서 6.25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 석방 되었습니다. 김 목사는 당시 인민군들이 아오지 수용서 인근에서 전쟁 연습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나는 저 함경북도 아오지 감옥에 있을 때 6.25 전쟁이 난다는 것을 알았어요. 왜냐하면 우리 감옥에 수 만 명이 있었는데 그때 인민군은 비행기로 공습 연습을 상공에서 자꾸 했어요. 그리고 대포를 쏘면서 전쟁하는 훈련을 아오지 쪽에서 했다구요. 그러니까 전쟁은 100%, 500%, 1천% 북한에서 다 준비해서 나온 것이죠.
전쟁이 터지자 서울로 남하 하던 김 영철목사는 미 24단의 통역관으로 합류해 2년여 동안 전쟁에 참여 했습니다.
그때는 학도병으로 군대에 나간 사람도 많이 있었고 나는 24단에 조인한 이유가 영어를 좀하니까 연결이 되어 대대에서 통역관 역할도 하면서 일선에서 종군했는데 그때 나만이 아니고 대학교 다니던 학생들 여러 사람들이 조인했습니다. 국군이 북한까지 들어갔다 다시 나와서 서울로 나오는 그 때에 내가 조인을 했습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미군들과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며 그중 가장 위험했던 일은 중공군에 의해 포위당했을 때라고 합니다.
우리 24단이 경기도 의정부 지나 춘천 가는데 가평에 들어가서 중공군에게 1대 중대가 포로가 되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헤어 나가려면 산을 피해서 나갈 길이 없어요. 또 미군들은 산을 걸어가는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았구요. 그때 죽을 뻔 했죠 그런데 거기서 포위망을 뚫고 나간 사람은 다 나가다 죽었고 다행히도 나는 부상병과 같이 거기서 죽으면 같이 죽자고 하면서 한 이틀 있다 유엔군이 다시 진격해 들어와 살아나와 죽을 고비를 넘겼고요
미 24단은 당시 일본에 주둔했던 부대로 2차 대전 후 고참병들은 다 제대를 하고 신병 위주의 부대였는데 갑작스럽게 한국전쟁에 투입 되었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또 죽을 고비를 넘긴 곳은 전투가 치열했던 금화 지구였다고 김 목사는 전했습니다.
최 전방, 금화 전방이었던 일동 포천이었는데 폭탄이 딱 내 앞에 와 떨어져요 이제 죽는다 하고 생각했는데 그 폭탄이 불발탄이 되어서 터지지가 않더라구요. 그래서 거기서 또 한 번 살아 났구요, 혹시 백의 하나 천의 하나 불발탄이 있는데 그것이 내 앞에 있어서 그 다음날 다시 돌아가서 그 폭탄을 캐어 보았어요. 불발탄이 되어 땅에 콕 박혀서 터지지 않았더라구요.
김 영철 목사는 전쟁이 끝나면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 꿈이자 목표이었기 때문에 휴전이 되자마자 도미를 위해 서울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군번을 받아 미군이 되는 사람이 있었지만 나는 군번을 받지 않았습니다. 공부를 할 생각으로 미국으로 갈 꿈을 가지고 전쟁이 끝나거나 말거나 어떻게 하든 공부하는 길을 모색하려고 했죠. 휴전된 그 다음날 중대장과 의논을 해서 서울에 나갔습니다.
그 후 김 영철씨는 도미해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미국인 교회에서 40여년이 넘게 목회를 하고 지금은 은퇴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한국 전쟁을 생각하면 휴전이 되었을 때 너무도 안타까웠던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고 말 합니다.
우리가 진격해 들어가 이북을 점령해야 되고 이북에서 나온 사람들이 천만이나 될 정도로 많았으니까 진격해 들어가야 하는데 휴전하고 났을 때 실망이 대단히 컸습니다. 몇 백 만이나 되는 북한에서 나온 실향민들이 가족과 헤어 지지 않았습니까? 그런 아픔 그 사람들에게만 국한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에게도 미쳤던 겁니다.
하지만 그때 미군들은 휴전을 반가워하고 기뻐하더라는 것입니다.
미군들은 다 좋아 했어요. 너무 희생자가 너무 많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끝나 자기들이 살아남아야 되니까 개개인의 미군들은 상당히 좋아하더라고요.
김 영철 목사는 또 전쟁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던 남한은 갑자기 군인을 모집해 훈련 없이 직접 전투에 투입시키는 바람에 북한에 들어간 군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행위를 한 것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습니다.
8월 달 까지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까지 인민군이 진격을 해 나갔어요. 그때 우리 국방부에서 징집을 해야 되니까 젊은 사람들을 모조리 붙잡아 군복을 입힌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총을 거꾸로 메는지 바로 메는지 모르는 사람 들도 많았어요. 그 사람들을 국군이라고 북한으로 끌고 들어갔는데 그들이 북한에 가서 창피할 정도로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이어 전쟁 중이라도 국군의 이름으로 북한에서 잘못된 일을 저지른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더욱이 젊은 여성들은 처음에는 소련에서 나온 로스케를 무서워했고 그 다음에 국군을 무서워하고 그 정도로 우리가 일을 잘못했어요. 난 그에 대해서 우리에게 상당히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잘못한 거죠 그런 점이 상당히 아쉽구요.
하지만 북한 인민군들 역시 남한 사람들에 대해 너무도 못할 짓을 많이 했다고 김목사는 회고합니다.
인민군들이 나쁜 짓 한 것은 말 할 수도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또 교육을 받은 사람들, 기독교인 들을 마구 데려다 다 학살을 하고 몇 백 명 몇 천 명씩 막 죽였어요. 내 눈으로 보았으니까 그런 나쁜 짓을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했구요.
김영철 목사는 이제 한반도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협상과정이 남아 있다며 종전과 함께 통일이 되기까지 북한 이라는 상대를 잘 알아야 타협이 아닌 협상을 할 수 있다고 강조 했습니다.
나 개인이 공산주의에서 당한 그 경험을 통해서 볼 때는 북한의 사상, 모든 정책 이라든지 이런 공산주의자들과 마주 앉아 타협하는 것은 아무 이득이 없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점령해 저렇게 기반을 해 놓았는데 우리가 협상하지 않고는 안 되죠. 그러니까 내 말은 북한을, 공산주의를 알고서 협상을 해야 한다, 그 사람들이 누구라는 것은 알고서 해야 한다, 요즘 특히 젊은이 들이 통일을 하기 위해서북한과 타협을 해야 한다고 주장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북한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타협 하자고 덤비는 사람들을 볼 때 걱정이 되고 염려가 되요.
그는 이어 한반도 전쟁이 일어 난지 56년이 지났지만 북한 내 정치범 수용소와 북한의 사상과 이념, 그리고 그들이 지향하는 바는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